올해 초등학교에 올라가는 둘째 아이가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분주하다. 생각나는 말은 있는데 엽서에 글로 옮기려고 하니, 막히는 부분이 제법 있나 보다.
"아빠, '터'는 어떻게 써?"
"터는 티읕 있지? '탱크' '토끼' 할 때 그 트. 거기에 어를 붙이면 돼"
"티읕이 어떻게 생긴 거지? 파할 때 그거?"
"아, 피읖 말고"
"아빠가 써 줘"
"응…. 요렇게 쓰면 돼. ㅌ"
"아"
...
"오빠, '쁜'은 어떻게 써?"
"비읍 있지? 그거 두 개 일단 써봐…."
이 글쓰기의 시작은 일주일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근하고 왔더니 아내가 둘째 아이가 썼다며 엽서를 건네줬다. 삐뚤 빼둘한 꼬마 녀석의 엽서였다.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의 고급 문체와 정제된 표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그런 것.
"아빠, 만이만이 좋아해요…. 내 머리위에 올려노세요. 답장를요…."
그날 바로 답장을 써서 잠든 아이 머리 위에 올려놨다. 아이가 아침에 그 엽서를 읽을 걸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날 아이는 또 엽서를 썼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또 답장을 썼다. 다만 그날은 두 장을 써야 했다. 오가는 엽서가 즐거워보였는지 첫째 아이도 이 엽서놀이에 가세한 것이다.
다음날 아빠보다 빨리 일어난 아이들은 아침에 아빠가 보낸 엽서를 읽고는 곧장 또 답장을 쓰고 있었다. 이젠 아빠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썼다. 엽서가 오갈 일이 많아지면서 우리 가족에겐 엽서를 주고받을 공간이 필요해졌다.
"상자에 넣어놓자" "그러면 누구한테 보낸 엽서인지 구별이 안 되잖아" "그러면 지정된 장소를 정해 놓을까"
그러다가 "가족 우체통을 만들면 어때?" "와,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렇게 우리는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찾았다. 마침 '오*록' 차가 담긴 상자가 보였다. 딱 적당한 크기. 그리고 오리고 자르고 칠해서, 그럴 듯한 '우리 가족 우체통'이 탄생했다.
그렇게 퇴근 후 나는 두 장의 엽서를 쓰는 게 일상이 됐다. 서점에 가서 10개에 천원, 이천원 하는 엽서 뭉치도 보충했다. 물량이 달릴 땐, 아이들에게 연습장과 종이도 얼마든지 엽서가 된다고 일러줬다.
초3이 된 첫째는 자기의 생각을 엽서에 어느 정도 풀어낼 줄 안다. 한글을 웬만큼 쓸 줄 알게 되면서다. 대견하다. 둘째는 막히는 글자를 아빠, 엄마, 오빠에게 물어물어 한 문장을 겨우겨우 완성해 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이들이 받아쓰기라는 딱딱한 틀을 통해 한글의 풍성한 세계를 발견하기보다, 이렇게 쓰고 싶은 말을 써 가면서 알게 되길 바란다. 아빠는 '한글의 맛'을 고등학생이 돼서야 겨우 맛봤다면 아이들은 이런 엽서놀이를 통해 좀 더 일찍 그걸 알았으면 한다.
한글의 풍성함을 발견하는 일은 아이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아빠 엄마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부부는 이번 주 미*트롯을 함께 보며 가사에 나온 '볼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것이 '가사 특유의 은유적 표현 아니겠느냐'고 했고, 아내는 '아마도 사전에 등재된 단어일 것'이라고 했다.
아내가 정답이었다. 볼우물은 '볼에 팬 우물이라는 뜻으로, ‘보조개’를 이르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들 영어는?"이라고 묻는다. 글쎄. 아이들이 궁금하면 그것도 찾아 나설 때가 오겠지. 영어는 모국어의 맛 정도는 제대로 본 후에 접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면 영어유치원이다 뭐다 상당히 위협적이다. 이런 내 생각을 상당히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변인들도 있기는 하다.
나 역시 귀가 팔락거릴 때가 있지만, 언어라는 건 본인이 흥미만 생기면 언제든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가 이번에 받아온 초3 교과서들을 보니, 2학년까지 없던 영어 과정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또 영어를 접하면 되는 것이다. 접하다 보면 흥미가 생길 수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1년, 2년 뒤. 또 10년 후 '우리 가족 우체통'에 꽂히는 아이들의 엽서 내용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