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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경 Apr 30. 2021

서른 넘어 처음 생긴 내 방_1


싸늘한 미남의 시선을 즐기며 잔다


는 어렸을 때부터 쭉 동생과 한 방을 썼다. 내 의지라는 게 생기기도 전의 일이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넓은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아무도 자신의 방을 갖지 못했다. 누군가 그런 혜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아마 부모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집에 엄청난 걸 기여하거나 장기적으로 좋은 딸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 이상 그 혜택이 내 차례까지 올 리가 없었으므로 나는 일찌감치 내 방 갖기를 포기했다. 철이 일찍 든 편이었다.(K장녀들 파이팅)



태어나고 자란 신정동에서 10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문래동으로 이사를 갔다. 평수는 조금 넓어졌지만 다섯 가족이 살기엔 여전히 턱 없이 좁은 집이었다. 나는 둘째 동생과 방을 썼고, 엄마는 막내와 안방을 썼다. 아버지는 언제나 거실행이었다. 남은 방은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창고로 쓰였다. 1996년도부터 2020년까지, 언뜻 눈대중으로 계산해도 한참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계속 문래동에 살았다. 10살 이전의 기억이라는 건 터무니없을 정도로 얄팍하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추억들은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집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자랐다. 문래동도 내가 학교를 네 번 졸업하는 동안 눈부시게 발전했다. 아무것도 없던 사거리에 스타벅스가 들어왔고 크고 작은 병원들과 회사, 카페, 헬스장이 줄줄이 들어섰다. 문래역에는 홈플러스가, 영등포에는 타임스퀘어가 들어오는 걸 지켜보면서 내가 팔십 쯤 되면 이곳은 대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문래동이 좋았다. 자기 동네를 그렇게 좋아하는 애는 처음 본다는 얘기를 참 많이도 들었다. 그런데 그럴 만한 곳이었고 문래를 떠난 지금도 그곳은 내게 좋은 곳으로 남아있다. 워낙에 오래 살아서인지,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익숙해서 딱히 불편함을 모르는 최적의 상태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정확하게 전등 스위치를 찾아 누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문래동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문래동 역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가능하면 독립을 하거나 결혼을 해도 문래에 머물고 싶었고,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건 아무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사 초기. 매트리스와 이불만 덜렁.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딸이란 얼마나 괘씸하고 부덕한가. 나는 아버지의 직업을 누구에게도 정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에게는 물론 제일 친한 친구들도 제대로 모르는 부분이다.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쭉 나는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창피했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회사에 다니면 좋을 텐데'하고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번 돈으로 먹고, 자고,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창피함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공장은 지하에 있어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화장실도 구렸지만 그래도 호황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누렸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 공장에서 일했던, 내가 삼촌이라고 불렀던 젊은 남자들. 모두 일하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고, 그만큼의 자리가 있던 시절이었다. 공장에 가면 활력과 젊음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두꺼운 철문 밖으로도 넘쳐흘렀다. 나는 아버지가 흰 셔츠를 입고 광화문이나 강남으로 출근하길 바랐지만 어쨌든 공장이 잘 굴러간다면 상관없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다 IMF가 터졌다. 아버지의 공장도 타격을 받았다. 삼촌들이 북적이던 공장은 아버지와 친삼촌, 그리고 엄마 이렇게 셋 만 남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공장이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으면 어떻게 됐을지를 상상하곤 한다. 아버지는 세상 돌아가는 건 몰라도 인복은 괜찮은 사람이라서 다 주저앉아 정리 직전이었던 공장을 살릴 희망을 사람에게서 발견했다. 어찌어찌 줄을 타고 알게 된 사람이 아버지에게 일을 대주기로 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여러 거래처에서 일이 밀려 들어와서 돈이 되는 걸 골라했었는데 이젠 그 거래처 하나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엄마는 지금쯤 다른 일을 하고 적당히 자리도 잡았을지 모른다고, 나는 여전히 아쉬운 목소리를 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하는 그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비전도 없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 기술력을 써먹기보다는 몸이 축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말 그대로 못 먹어도 고를 외쳤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선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등바등 살았다. 카드로 카드를 돌려 막고 수입이 전혀 없었던 달도 여러 달이었다. 그러다 진짜 죽을 것 같으면 딱 숨통을 트일 정도의 일이 들어와서 공장을 또 아주 놓을 수는 없는 일이 반복됐다. 그게 무슨 루틴처럼 굳어져서 아버지와 엄마는 적당한 불행 없인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믿는 처지에 이르렀다. 우리 집의 불행은 결국 돈이었다. 그러다 결국 파산이라는 태산 같은 두 글자 앞에서 아버지는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우리의 유일한 재산, 집을 팔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2020년 6월의 일이었다.


귀여운 스티키와 알린이 지켜주는 머리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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