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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경 Apr 30. 2021

서른 넘어 처음 생긴 내 방_4

 방이 생기고 나서 나와 동생은 서로의 다정한 이웃 같은 관계가 되었다.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는 게 뭔가 아직은 좀 어색하기 때문에 그 어색함을 무마하러 서로의 방에 자주 놀러 간다. 동생은 방에서 대개 한스 짐머나 이병우, 혹은 뮤지컬 넘버를 듣고 있다.(최애는 차지연이다) 아니면 90년 대 노래 무한 반복이다. 진짜 질리지도 않고 듣는다. 방이 생기니까 뭐가 제일 좋냐고 묻자, 눈치 안 보고 듣고 싶은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는 거란다. 나는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반면 동생은 뭐 하나에 꽂히면 주야장천 그것만 파는 스타일이라 아무래도 동생이 같은 방을 쓰는 내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반나절 내내 같은 음악을 틀어놔도 터치하는 사람이 없으니 숨통이 트였나 보다.

브로, 그건 내가 미안해. 근데 너의 음악적 취향... 쏘 하드한 것.


동생 방에서 꽁냥꽁냥.


나한테 방이 생기고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글쎄. 그냥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거. 그게 제일 좋다. 문래 집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방에 가나 누군가 있어서 통화라도 길어지면 화장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침대에 누워서 통화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나한테는 다른 게 아니라 그게 진짜 드라마였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거였으니까.


집이 나에게 안식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퇴근 후에 한참 밖을 쏘다니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친구들은 내가 퇴근하면 오늘은 어디 가냐고 물었다. 바로 집에 간다고 하면 몸에 이상이 있거나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 정도였다. 집에 가면 좀 맘 편히 쉬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주먹 하나 사이를 두고 동생이 누워있고 거실은 아버지가 완전히 점령해 버려서 방 밖으로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렇다고 창고 방에 있자니 거기는 진짜 말 그대로 잡동사니 천국이라서 마음에 여유고 나발이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정신이 사나워지기 일쑤였다.(무엇보다 그 방은 여름에 불가마여서 잠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등이 다 젖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최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차라리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서는 잠만 자곤 했던 것이다. 외식비가 매달 어마 무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싫었다. 집에 대한 내 감정은 환멸에 가까웠다. 가면 내 체력이며 정신력이 야금야금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으니까. 이러니 내가 얼마나 방을 가지고 싶었겠는가.


이젠 떠돌이 생활 청산.


물론 독립을 꿈꾸기도 했었다. 실제로 올 초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했다. 나름 큰마음먹고 대출 상담까지 마친 뒤 발품을 팔아 신림에 괜찮은 투룸을 고르기까지 했다. 사실 독립 허락을 기대하진 않아서 계약을 한 다음에 통보하려고 그랬다.(허락보다 용서가 쉽자나요) 그런데 워낙 중대사다 보니 그렇게 무를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자체가 꽤 부담스럽고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엄마한테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독립하고 싶다고. 사실은 집도 대출도 다 알아봤다고 말이다. 그때 우리 집 이사 얘기를 처음 들었다. 엄마는 이사를 가게 되면 집을 팔고 남은 돈으로 내가 독립할 때 돈을 좀 보태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좀 기다려 보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고 나로서는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독립으로 불태우던 야망이 쏙 들어가 버렸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는데, 꼭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달콤한 위안에 그만 홀라당 넘어갔다. 그땐 진짜 엄마한테 진짜 잘해야지... 싶었다.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하하하) 대신 내가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이유가 생겼다.


막내가 제주도로 내려가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또잉 제주도라니요.


사실 막내는 오래전부터 제주도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사회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한 막내는 일을 시작한 직후로 꾸준히 적금을 붓고 있었는데 그 적금이 만기 되면 제주도로 내려갈 거라고 줄곧 얘기했었다. 다만 그 적금이라는 게 기한이 5년짜리라 그거 대체 언제 만기냐, 언제 만기냐 하며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러버렸는지... 큰돈이 생기면 생각이 다른 데로 갈 법도 한데 막내는 대쪽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로 하여금 독립 승인을 얻어낸 건 막내의 소나무 같은 기개 때문은 아니었다. 순전히 점쟁이의 말 때문이었다.

한창 우리 집의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가 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찾아갔던 점쟁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막내는 떠날 거라고. 제 앞가림 잘하는 애니까 붙잡지 말라고. 본인들(아버지&엄마) 걱정이나 하시고 자식들 걱정은 이제 그만하라고 했단다. 진짜 웃기다. 아니 뭐, 결국 좋은 쪽으로 도움 준 건 고맙긴 한데, 그냥 그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왜냐면 평소 아버지라면 독립? 얘기를 듣자마자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반대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내 평생 아버지와 엄마의 그 꼭꼭 닫혀있는 조선시대 마인드를 바꿔 주려고 골칫덩이 딸년 소리를 들어가며 N년간 투쟁한 역사가 있는데. 그 어려운 걸 점쟁이가 한큐에 해냈다는 게 너무 허탈했다. 암튼 점쟁이 덕에 막내는 추석이 지나자마자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졸지에 4인 가족이 된 우리는 남은 방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게 됐다. 내 방은 그렇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가끔 잠이 안 올 때면 이 방을 막내와 맞바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런 밤이면 막내는 행복을 찾아 떠난 거라고, 아주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마음속으로 막내에게 응원을 보내면서 애써 잠을 청하곤 한다.


막내는 제주도에서 아주 잘 지내는 중.


만약 가족의 모양이 달라지게 된다면 그 역할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건 나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결혼이든 독립이든, 집을 떠나는 건 내가 일빠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아니었다. 남겨진 입장이라는 거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건 생각보다도 훨씬 쓸쓸한 거였다. 나는 아직도 막내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다. 오늘 뭐 먹었어? 알아도 몰라도 그만인 일상을 물어올 것만 같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소소한 모습이 그리운 거 보면 나에게는 그런 순간이 소중했나 보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지만 사는 공간이 달라진 이상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손님이 될 수밖에 없다. 만나게 된다면 오늘 뭐 먹었냐는, 그런 가벼운 안부 대신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는 조금은 형식적인 안부를 묻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것들이 슬프다. 좀 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막내에게 오늘이 아닌, 요즘의 근황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그래 나 동생 더쿠다)


맨날 내 방에 놀러 왔던 막내.


막내에게 떳떳한 멋진 언니가 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내 인생에서 '열심히'라는 단어를 소모할 만한 일은 이제 글쓰기밖에 없다. 꽤 많은 취미를 가졌던 나지만 결국 특기로 남은 것은 글쓰기뿐이다. 


나한테 글쓰기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때 담임이 체육 선생님이었는데, 아무래도 체육인이다 보니 말이나 손이 좀 험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7차 교육과정 손드세요) 체벌이 존재했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몇 대 맞는 건 별다른 이슈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반에서 조금 드센 성격의 남자애가 선생님한테 맞고 앙심을 품었다. 그 애는 분에 못 이겨 의자를 발로 뻥뻥 차다가 갑자기 칠판 앞에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부당해. 우리 선생님을 몰아내자! 무슨 소리인고 하니 자그마치 탄원서를 쓰자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니 약간 엄석대 재질이었던 듯) 모두의 글을 모아서 교장선생님한테 갖다 주면 그 선생님은 반드시 잘릴 거라고 그 애는 아이들을 추동했다. 그 애의 분노가 대단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싫다고 하지 못했고, 다들 담임한테 맞았던 기억도 있어서 그럼 어디 써볼까~하는 느낌으로 탄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나이에 반성문을 써본 적은 있어도 어른을 상대로 탄원의 글을 쓰는 건 처음이어서, 그게 또 생각보다 엄청나게 흥분되는 일인 지라 쓰다 보니 너무 몰입해버렸다는 거였다. 탄원서를 쓰는 동안 나는 점점 스스로의 글에 동화되어 담임을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을 때 담임은 학교가 아니라 세상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 탄원서를 읽고 당황하던 엄석대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 아이는 내 얼굴을 보고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야...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탄원서 사건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는가 하면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워낙에 눈에 안 띄고 평범한 여자애였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중심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엄석대가 내 글을 읽고 이 정도는 아니라고 했을 때 그 드센 애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만족했다. 글쓰기에 조금 자신감이 붙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흔한 글짓기 대회 상장 한번 받아본 적이 없는 걸로 보아 정말 근자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그 사건은 내가 다른 애들보다 글쓰기를 조금 더 잘할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얻은 첫 사건이긴 했다.


+ 여담이지만 결국 탄원서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그 맘 때 애들이 다 그렇듯, 시간이 조금 지나자 탄원서고 뭐고 다 귀찮아진 탓이었다. 뭣보다 우리 담임은 평소에 체육이라는 담당 과목의 월권을 마구 휘두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 반은 다른 반에 비해 운동장을 차지하고 놀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애들은 이런 계산은 또 기가 막히게 빠르다) 아마 엄석대의 원망은 공 몇 번 차고 뛰어노는 동안 눈 녹듯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부터다. 관련 학과에 진학하면서 나는 글에, 정확히 말하면 소설의 매력에 푹 빠졌다. 멋있는 이유 같은 건 없고 그냥 좋은 작품을 읽고 쓰는 일이 즐겁다. 고맙게도 아직까지 그렇다. 아마 글쓰기보다 더 재밌는 뭔가를 찾으면 목표를 바꾸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진 글쓰기가 제일 재밌고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다. 한 명쯤은 울리고 열 명쯤은 웃기고 백 명쯤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가능할까?)


다름 아닌 책장 뷰.


지금까지 꽤 많은 글을 써왔다. 직업이 글쓰기에 묶여있는 건 둘째치고 나라는 인간 자체가 선택한 종목이라는 게 하필 글이라서 글을 쓰지 않고서는 딱히 나를 설명할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 돼버렸다. 누군가의 방에 가면 그 사람이 보인다던데, 나는 내 방에서 글 쓰는 사람의 향기가 풍기기 바랐다. 그래서 다른 것보다도 책장을 고를 때 신중했다. 문래 집에서 책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아까운 책을 버리고 온 터라 이번에는 뭣보다 책을 상하지 않게 하는 책장을 사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고른 게 서랍식 책장이다. 여닫기 편하고, 먼지 안 타고, 무엇보다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꽤 깊어서 책이 생각보다 꽤 넉넉하게 들어갔다. 일반적인 책장이 책을 꽂는다는 개념이라면 서랍식은 넣는다는 개념이라 더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좋았다. 높이도 알맞아서 위에 캔들과 향을 피우기에도 딱이다. 책장 맞은편에 앉아서 작업을 하다가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책장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작업실이라고 부르기엔 거창하지만 앉은뱅이책상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글을 쓰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별로 없다. 아마 나는 이 방에서 많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매일 조금씩 따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글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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