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_ 잔 속의 달

by 빈자루

그때. 탕비실의 뒤에서

거구의 사내가 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제 네가 나설 때가 된 것 같구나."


그가 나의 민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승광 사숙이었다.






"사. 사숙. 대륭은 지금 혼란합니다. 어찌 제가."

내가 말했다.

"너에겐 민머리가 있지 않느냐."

사숙이 말했다.

그가 나의 머리통을 쓸었다.

"민... 민머리요? 이 머리로 저 성난 대중들 앞에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장수. 민머리는 단지 머리카락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저 성난 대중들의 뒤에. 불안에 떨며 양극화된 대륭의 뒤에 숨죽인 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너의 머리는 그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사. 사숙. 어찌 그런 말씀을."

사숙이 말했다.

"너의 머리는 어느 곳 하나에도 치우쳐 있는 곳이 없다. 자유도. 평등도. 성장도. 분배도. 이념도. 갈등도. 성별도. 지역도. 어느 곳 하나 치우친 곳이 없다면 그것이 태초의 무림. 어떠한 의지도 권력도 가지지 않은 것이 가장 순수한 것 아니겠느냐.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사람이 운집하면 그곳은 부패하는 법. 너의 머리엔 어떠한 의미도 묶음도 없다. 다만 비어있을 뿐."

서늘한 바람이 머리 한 구석을 치고 달아났다.

"그것이 민머리주의니라."

사숙이 말을 마쳤다.

그의 머리에서 형형히 빛이 났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어. 갈라진 민심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대륭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야. 내가 대표해야 한다면 그들을 대표하겠어.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자들. 더이상 싸움을 원하지 않는 자들. 정파와 사파. 그들의 독점을 무너뜨리겠어!

나는 결심하였다.

나는 출마를 결심하였다.

마감은 이틀 뒤. 출정 선언이 코 앞으로 쫓아와 있었다.

나는 결심하였다.



*

"대저. 그 복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림맹 산하 개봉부의 사맹천이 정사홍에게 물었다.

"흣.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

정사홍이 만족해하며 배를 두드렸다.

사맹천이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내쫓았지. 우리는 양명이란 자를 내세울 것이야."

"양명? 몇 해 전 무림맹에 난장을 치고 내쳐진 그 망나니를 말입니까?"

"그래. 그랬었다 하더군."

사맹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망나니를 왜 다시 들이시는 겁니까?"

"그자가 오온의 적통이야. 무림촌 1검이라 불렸다는군. 지금은 꼼장어나 썰고 있지만. 크크."

"오호라. 오온의 이름값을 쓰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흥. 그 늙은이. 찌그러진 살가죽에 노인냄새가 불쾌했었는데. 이렇게 또 쓸모가 있군. 흐흐흐."

정사홍이 술을 머금었다.

"과연. 맹주님의 지략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칩니다. 핫핫핫."

달빛이 은밀하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잔 속의 달이. 일그러져 있었다.






https://youtu.be/80M2gGeifaY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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