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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란 Feb 05. 2021

오늘의 커린이2

#아침에는일기를

<땅콩 크림 라떼 만들기>, 레시피는 간단해 보였다. 

1. 휘핑크림 땅콩버터,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든다
2.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3. 에스프레소와 우유 위에 크림을 얹는다


냉장고를 열어 본다.

일단 땅콩버터는 사야 되고... 휘핑크림이 조금밖에 안 남았네. 우유도 하나 더 사야지.

비정제 설탕을 넣어볼까. 나간 김에 빵도 사고, 저녁에 카레장 봐야지. 감자 두 개랑 양파 한 개! 

잊지 말고 사야지. 집에 없는 재료만 사야지.


빵집은 제법 걸어야 하니까 백팩을 메고 운동화를 챙겨 신는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양말도 잊지 않고 챙겨 신는다. 지난번에 발목 양말을 신었다가 신발끈에 발목이 쓸려 생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아는 길이지만 웬만하면 다른 길, 차도보다는 골목길로 걷는다. 오래 걸려도 새로운 풍경 속에 있으면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른다. 생각이 다르게 흐를 수 있는 기회를 버릴 이유는 없다. 얼떨결에 최단 거리로 와 버렸다. 매일 이십 분이 걸렸는데 십 분 만에도 올 수 있는 거리였구나. 다음에는 한 시간이 걸려서 가봐야지 생각하며 고르곤졸라 바게트 크루아상 호두 커런트 올리브 치아바타 주세요, 말한다. 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


다음은 장 보러 갈 장소를 고른다. 백화점과 농협 하나로마트, 그리고 홈플러스 세 곳 중 땅콩버터와 비정제 설탕이 무조건 있을 만한 곳은 백화점. 휘핑크림이랑 감자, 양파는 기본적으로 있을 테니까 백화점만 가면 한 번에 해결되겠다. 백화점 가는 길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서 어제 망설이던 책을 살 요량으로 백화점을 가로지르는 골목을 걷는다. 어제 분명 두 권이나 있었는데 하루 만에 팔렸겠어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은 빨라진다. 두 권 다 있어야 좀 더 깨끗한 걸 고를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두 권 다 팔리지 않았다.


백화점에 입성했다. 열 체크하는 분은 쉬는 시간인가. 열화상 모니터에 숫자를 셀프 체크하고 땅콩버터부터 찾는다. 땅콩 알갱이가 있는 건 식빵에 발라먹으면 맛있겠는데, 크리미 한 게 음료를 만들기에는 더 낫겠지. 백화점이라고 감자도 두 종류나 된다. 돼지감자가 100g에 600원으로 200원 더 비싸지만 흙에서 막 파낸 것처럼 더러워서 신선해 보인다. 감자 2개에 2,250원이 요즘 물가인가. 아니면 '백 그람에 몇 백원' 여기에 속은 걸까. 저기... 휘핑크림이랑 비정제 설탕은 왜 안 팔아요? 백화점이잖아요...


괜찮다. 농협 하나로마트도 집에 가는 길이니까. 양파는 농산물 직거래하는 마트에서 사도 한 개에 천 원이 넘는다. 100g 당 310원씩 더 비싼 감자는 이미 백팩 안에서 책이랑 뒹구는 중. 아니 농협에도 휘핑크림이 없다고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홈플러스에 갔어야 했는데. 홈플러스에는 땅콩버터와 휘핑크림, 비정제 설탕은 물론이고 감자와 양파도 늘 상시 구매가 가능한 데다가 집에서 3분 거리인데. 집에 돌아왔지만 아직 오전이니까 휘리릭 땅콩 크림 라떼를 만들면 된다


간단해 보이는 레시피대로 음료를 만들어 본다.

1. 휘핑크림 땅콩버터,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든다

비정제 설탕을 산 김에 휘핑크림 70ml에 땅콩버터 두 스푼과 함께 넣어 섞어 본다. 휘핑기로 오 분 넘게 치는데 설탕은 꿈쩍도 안 한다. 녹지 않아 결국 포크로 콕콕 찍어 잘게 부순다. 십 분이 지났다. 


2.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포트에 물을 끓이고, 원두 17g을 계량한다. 그라인더 눈금을 8에 맞추고 24초에 걸쳐 갈아준다. 물이 끓으면 수동 에스프레소 머신의 포타 필터를 예열하고, 곱게 갈린 원두를 템핑. 꾹꾹. 울퉁불퉁하거나 모난 곳 없이 골고루 평평하게. 예열된 물을 버리고 수동 머신을 조립해 에스프레소를 1분에 걸쳐 추출한다. 동선의 문제로 에스프레소 추출에만 십 분이 걸렸는데 1차 시도는 실패다. 

나는 아직 에스프레소 담을 그릇이 못 되나보다. 에스프레소가 쫄쫄쫄 나오고 있는데 바닥으로 흐른다. 이번에는 컵부터 준비해서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한다. 처음 시도하는 것, 서툰 것들이 늘어나야 한다. 배려와 이타심을 기르는 데 있어 첫 시도만큼 유용한 게 없다. 내가 서툴면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에스프레소 수동 머신 구입을 추천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2차 추출은 성공


3. 에스프레소와 우유 위에 크림을 얹는다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수동 머신 추출 두 번에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난 12월. 2회 남은 필라테스를 코로나 단계 격상을 핑계로 가지 않았고 그 후로 2개월 동안 하루에 백보도 걷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에스프레소를 부은 다음 우유를 부어야 하는지 그 반대인지 순서를 찾아보는 게 귀찮아 우유 위에 에스프레소를 훅 부어버렸다. 까만 물이 된 상태에서 냉장고에 넣어둔 크림을 얹는데 크림이 묽어졌는지 자꾸 섞였다. 위에 구름처럼 떠있어야 하는데. 그야말로 실패지만 사진은 찍어야 한다. 망한 것도 나니까.


오늘 오전이 몽땅 망한 커피 한 잔에 담긴 기분이 들었지만 나의 오전이 완전히 망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나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홈플러스만 가면 되는데 백화점을 가야 할 것처럼 생각했다. 실은 책이 사고 싶어서.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설 때 나의 땅콩 크림 라떼가 실패하리란 것을, 아니 그보다 전에 카페가 휴무인 것을 확인했을 때 이미 나의 오전이 망할 거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의 오전이 망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건. 적어도 다짐을 져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에만 있다. 사람을 만나지 않을수록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익숙해질수록 생각이 생각에서 그친다. 


미이라 같은 하루의 반복보다는 망한 오전이 담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편이 산 사람에게는 어울린다. 커피는 망했지만 나의 오늘은 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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