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ving Tree Sep 11. 2016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초상화를 통한 mindfulness practice

오늘 회사에서 Staff retreat이 있었다. Staff retreat이라 하면 전 사원 단합대회 형식의 행사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해 참석하고 어느새 두 번째 retreat인데 회사 성격이 성격이니 만큼 행사의 주제는 언제나 self-care다. 지난해 행사에서는 vicarious trauma, 즉 트라우마 클라이언트들과 일하면서 그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불안한 반응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이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시카고에서 성폭행 피해 아동 청소년들과 일할 때 경험한 적이 많았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매일 네다섯 명의 클라이언트들과 각기 다른 무서운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다 보면 내 몸과 마음에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몸이 아플 때도 있었고, 무기력함을 느낄 때도 있었고, 불안이나 우울 같은 증세를 약하게나마 겪을 때가 있었다. 물론 슈퍼비전을 받으면서 이런 현상을 점검하고 대비하는 훈련을 하고 또 회사에서 치료사들도 일주일에 한 번 카운슬링을 받게 하거나 요가, 운동, 명상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대부분 잘 극복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었다. 


지금 회사는 시카고 때와 조금 성격이 다르다. 우선 residential treatment center의 특징 상 클라이언트들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많다. 우리가 일하는 공간이 그들의 삶의 공간이다 보니 툭하면 사무실에 찾아와 일하는 중에도 말을 걸고, 욱하면 욕도 하고, 심심하면 찾아온다. 그들의 입고 자고 먹고사는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다 보니 트라우마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대게는 지금 당장 삶을 사는데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치고나 행동을 다잡는데 모든 에너지가 쏠린다. 물론 치료사들은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 임무라고 하지만 RA (residential aid, 생활지도사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기관 내의 클라이언트들의 스케줄과 식사 등을 책임진다.)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켜 우리를 찾아오기 일쑤다. 그들을 적절하게 차단하다는 것 또한 우리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사실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나를 찾아오는 클라이언트에게는 마냥 내 옆에 앉아 떠들 수 있게 내버려 둔다. 물론 해야 할 일이 있어 건성으로 이야기를 듣는 때도 있지만 흥미가 가거나, 공감이 가는 얘기가 나오면 수다를 떨다 업무시간을 놓치는 때도 있다. 가끔은 클라이언트에게 단호하게 '당장 내 사무실에서 나갈래?'라고 말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들에 비해 자유시간이 많은 편이고 업무 양도 적다. 회사에서 시즌 때마다 요구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겹치지만 않는다면 사실 나는 아이들과 수다를 떠는 시간이 충분히 나의 업무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임한다. 


작년에 이곳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이 많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내가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시작한 시점인 것 같다. 한동안 기관 안의 분위기가 안 좋은 때가 있었다. 그룹 역동이 너무 안 좋아서 그룹치료 자체를 할 수가 없었고 대게는 개인 세션을 하거나 치료 자체를 거부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때 정말 여러 가지 창작활동을 시도했었는데,  아무것도 아이들의 마음을 다잡아주지 못하는 것 같은 그 시점에 나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집어 들고 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카고 대학원 일 년 선배 정은혜 미술치료사의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라는 치료 에세이를 읽고 선배가 정신병원에서 일할 때 진행했던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시카고에서 성폭행 피해자들과 일할 때 처음에 치료 관계를 쌓아가는 단계에서나 치료가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그들을 그려준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혼돈스럽고 예민하고 공격적이고 긴장감이 가득한 그런 상황 속에서 무작정 시작된 그림 그리기였다. 초상화가 금방이라도 폭력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을 잠재워준 사건도 두어 번 있었고, 절대 자기 방에서 안 나올 것 같은 우울증의 소녀를 미술치료시간에 내 앞에 앉게 해주었고, 입만 열면 욕밖에 하지 못했던 아이의 입에서 아름답다라거나 고맙다라거나 하는 단어를 내뱉게 하는 믿기 힘든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 사무실에 찾아온다. 내가 그린 그들의 초상화가 딱히 훌륭하다기보다는 그저 오랜 시간 아무런 판단 없이 그들의 눈을 바라봐 주는 사람에게 느끼는 편안함 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편안해지면 나도 편안해진다. 그들이 즐거워하면 내 마음도 즐겁다. 


시카고에서 일할 때에는 온통 트라우마에 치료가 집중되어 있었다. 우리는 Trauma focused treatment를 제공하는 기관이었고 트라우마가 다뤄지면 다른 문제들이 있었도 다른 카운슬링 센터로 refer out 하였다. 좀 더 전문적인 치료를 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지금 일하는 곳은 비슷한 트라우마를 다루지만 Trauma focused가 아니라 Trauma informed care를 하는 기관이다. 클라이언트 한 명 한 명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지금 클라이언트의 정서적 행동적 상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과 만난다.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 지금 여기에 (here and now라는 게슈탈트적 입장이 더 크다) 나는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들의 현재 모습을 그림에 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현재 이곳에서 이 상황에서 나는 클라이언트의 표정, 제스처, 눈빛에 집중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아무런 분석, 진단, 판단 없이 그들과 만난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나면 클라이언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가 왠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오늘 Staff retreat에서는 mindfulness practice라는 주제로 워크숍을 했다. 그 큰 공간에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20분 정도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데 나는 마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홀로 있음을 느껴봤다. 누가 나를 쳐다본다는 생각 없이 고요함과 고독 속에서 건물의 진동도 느끼고 건물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도 느끼고   허리의 미세한 통증, 어깨 근육의 뭉침, 내 마음에 스쳐가는 잔상들까지 모두 느꼈다. 내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거나, 생각이 자유롭게 흩어지는 것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나니 내가 나한테 수용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초상화를 그릴 때 클라이언트 들이 느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료관계를 이어준 그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