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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ving Tree Feb 21. 2019

예배보다 상담

교회에 보내지 마세요 라고 권하다.

"아이들을 경외하라. 어떤 아이를 만나도 한 명의 존엄한 인간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라.” - 루돌프 슈타이너

주일날 예배시간도 포기하고 스튜디오 문을 열어 만난 아이는 네 시간을 운전하고 나를 만나기 위해 뉴저지로 내려온 한 중학생 소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의 의지보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더 크게 느껴지는 케이스였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짧고 굵은 검사 겸 컨설팅 세션을 하기로 했다. 소녀는 섭식장애와 조울증을 겪고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상담이나 상담사에 대한 청소년들의 저항이 삶에 대한 강력한 에너지로 느껴져 설레는 나를 어떤 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온몸으로 나와의 연결을 거부하는 그 소녀에게  삶에 대한 강력한 에너지를 뿜을 수 있도록 공간과 시간을 주었다. 거절은 거절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인간에겐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그 무엇을 강력히 거절할 권리가 있다. 내담자의 거절을 거절로 인정해주되 나는 그들을 거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아주 미세한 표정의 변화, 움직임에 나는 세심하게 반응한다. 대게 아이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우리의 거리를 좁혀 주는 매개체로 나는 그림을 사용한다. 그동안 말로 두드려 맞고 말로 맞공격을 해왔던 그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하던 어떤 질문을 하던 말은 그저 불안을 증폭시키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나는 그림을 그렸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와 함께 때때로 소녀의 얼굴을 응시하기도 했다. 소녀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느껴주었다. "나는 너를 판단하지 않아. 너를 존중해. 나는 안전한 사람이야."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소녀가 나의 의도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침묵으로 다 써야 한다 해도 그녀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나는 대답해주었다.
"여기는 안전한 곳이고 나는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억지로 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야. 나는 그냥 네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계속해서 좌절되었던 삶을 살아왔던 소녀에게 그 짧은 시간 안에 희망이나 목표 따위의 이야기는 전혀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내가 무엇을 하던 오늘의 이 시간으로 소녀의 무엇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소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해주었다.

"나아지고 싶지 않구나.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우울함이 너에게 오랫동안 유일한 친구였는데 그 유일한 친구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

그것은 소름 돋게도 소녀의 진심이었다. 소녀에게 유일하게 소녀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친구가 우울이었다. 우을을 걷어내면 소녀는 또다시 혼자가 된다. 자신들이 우울만큼 언제나 함께 해주는 친구가 되어줄 것도 아니면서 우울과 이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소녀에게 모순적인 요구다.

하지만 우울과 소녀의 친구관계 또한 건강하지 않다. 우울은 소녀를 독점하고 있다. 수평적 관계라기보다는 수직적 관계다.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소녀에게 자유롭게 결정하게 하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학대에서 흔히 보이는 사이클이다. 그래서 나는 소녀에게 내가 본 우울이란 친구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당장 그 친구와 헤어지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우울이 너 옆에 항상 함께 하는 친구라는 것.. 그리고 친구는 만났다가도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상담의 한계였다. 소녀가 나를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에게 약물치료와 지속적인 상담을 강력하게 권했다. 어른의 관점에서가 아닌 아이의 관점에서의 아이의 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소녀를 억지로 교회에 보내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교회가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지 어느 장소, 건물, 집단이 아니라고 배웠다. 왜 이 소녀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고 자신들이 준 상처를 외면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 집단에 머물러 있게 하는가? 엄밀히 따지면 엄마가 자신의 딸을 가해자 집단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겪이 아닌가? 상처 치유라는 목적으로...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그리고 짧고 굵게 그것 또한 아동학대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뒤로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험담하는 상황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옷을 야하게 입는 사람, 예배에 자주 빠지는 사람, 성경을 모르는 사람,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 특히나 아이들의 거친 행동들, 욕을 하거나 행실이 껄렁거리면 그 모든 것들이 단두대에 올려진다. 교회에서 보이는 겉모습에 대한 판단기준은 숨이 막힌다.

나는 예배를 가지만 예배가 불편하다. 교회 안에서의 나눔에 과연 진정성이란 것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 같은 소녀를 만나기 위해 예배를 째는 것쯤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소녀와 헤어지며 하루하루를 잘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에게는 상담이 예배보다 먼저라고 일러주었다. 치유의 하나님은 건물이나 그 안에서 행해지는 의식 안에 갇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로 또 어떤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아주 달게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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