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날 우리는 남도에 있었다.
3월의 부산은 푸른 바다를 향해 가는 길가에도, 산자락에도 벚꽃이 지천이었다. 벚꽃이 만들어낸 터널을 지나 햇살 눈부신 흰여울마을에 오르면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인다. 걸음을 떼다가 고개를 돌리면 옆에는 항상 흰 물결 넘실대는 바다가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에 햇살이 부서져 반짝이다 사라진다. 서둘러 돌아본다고 했으나 경치에 정신이 팔려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는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 다대포의 낙조를 놓칠 수 없다.
차를 달려 다대포 해변에 도착하니 다행히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으로 잔잔하게 밀려 왔다 밀려가는 파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제 색을 잃어갔다. 산을 넘어 기울어가는 저녁 해는 선연한 빛으로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바다로 달려간 아이의 몸도 어느새 붉게 물든다. 다대포의 바다에서 아이는 바다와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처연하게 아름다워 코끝이 시큰해지는 이 장관을 보려고 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붉은색은 점점 짙어지고 바다에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우리는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간간이 물결은 찰랑거리고 주위에는 소리하나 없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광안대교의 야경은 밤이 깊을수록 화려하게 빛났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다리는 제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잠은 깊이 들지 않아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인적 없는 바닷가를 아이와 둘이 한가하게 거닐어본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머물고 싶은 곳에 물릴 때까지 있어 보는 것이 자유롭게 여행하는 맛이다.
경주는 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 이후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수학여행지도 경주였다. 아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우리의 수학여행지로 떠나는 여행은 기분이 묘했다.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 10분 정도 달리면 대릉원에 도착한다. 대릉원은 천마도와 금관으로 유명한 천마총과 미추왕릉 등이 있는,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대릉원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차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이 모인 사람들은 한적한 고분을 여유있게 둘러보고 산책하기보다는 사진찍기에 몰두했다.
경주의 밤은 화려하게 빛난다. 우리는 번화한 도시보다 한적하고 오래된 소도시의 골목을 좋아한다. 화려하게 불을 밝힌 대릉원 너머의 황리단길에는 우리가 기대하던 고풍스럽고 한적한 골목은 없었다. 날이 저물며 적막해진 대릉원과 달리 황리단길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고색창연한 도시는 밤새 몸살을 앓는다.
늦은 밤에 찾아간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신라의 태자가 머물던 별궁은 밤이 깊을수록 화려해 달빛 비치는 연못에 불빛마저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물에 어른거리는 불빛은 생동감마저 느껴져 렌즈로는 다 담아낼 수가 없었다.
동궁과 월지를 나와 월정교로 걸어가는 길은 불빛 하나 없는 산길이었다. 인적없는 산길을 내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오싹한 일이라 우리는 꼭 붙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가 옆에 있으면 나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목도 못 가누던 갓난아이 때도 아이를 품에 안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지켜주고 길러냈다기보다 아이가 나를 지켜주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살면서 힘에 부쳐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을 것 같은 순간들을 아이 덕분에 견뎌내며 여기까지 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분홍색으로 빛나는 첨성대가 눈에 들어오고 조금 더 내려가니 드디어 화려하게 조명을 밝힌 월정교가 보였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헤치며 돌다리를 건넜다. 사람들과 떨어져 돌계단에 앉으니 비로소 물 위에 일렁이며 그윽하게 빛을 발하는 월정교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조용히 나만의 여행을 즐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