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근황(23.12.23)

이웃


세 들어 사는 건물에는 여러 집이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고, 짐작했다. 지나다니다 건물 입구에서 사람을 마주칠 때면 이웃이겠거니 하고 그냥 고개만 숙였다. 공동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2층 할아버지께서 관리인처럼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 비용을 담당하곤 했다. 그러던 지난겨울 할아버지께서 몸이 안 좋아지신 이후에 처음으로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아홉 가구는 그제야 서로 인사다운 인사를 했다. 이것 좀 많이 속물적인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규칙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5층 아주머니가 총무를 맡아주시기로 했고 매달 관리비를 정산하셨다. 가끔 공동 비품을 살 때면 단톡방에 의견을 구하기로 하셨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겠지만 교류가 있으면 정도 따라붙는다. 건물 공동 현관에 누군가 비치한 게시판에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추석에는 누군가 명절 잘 보내라는 문장을 적고 갔다. 다른 가구들도 댓글을 달듯이 저마다 명절 인사를 건넸다. 3층 애기는 얼마 전에 첫돌이었는데, 집집마다 손편지와 떡을 두고 가셨다. 이번에 또 누군가 게시판에 “누구야! 첫 돌 축하해!“ 인사를 남겼고, 다들 한 마디씩 적었다. 아이가 아직 글을 읽지는 못할 테지만, 그 나이에 벌써 롤링 페이퍼로 생일 축하를 받겠구나 싶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니 방이 조금 싸늘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씻으려 화장실에 갔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놀라서 핸드폰을 보니 바깥 날씨가 영하 12도란다. 부랴부랴 편의점에 뛰어가서 생수 두 통과 핫팩을 사 왔다. 단톡방에 팰리세이드 차주 분이 누군지를 묻고 수도계량기를 녹여야 하니 차 좀 빼주십사 연락을 드렸다. 자다 깨신 듯한 4층 아저씨가 부랴부랴 뛰어오셨다. 내가 계량기 뚜껑과 낑낑대자 다시 집에 뛰어들어가시더니 망치를 들고 나오셨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드렸다.


새벽에 집에 와보니 현관에 황금향 한 박스가 놓여있었다. 이게 웬 것인가 싶어 단톡방을 다시 확인해 봤다. 5층 총무 아주머니가 동파 방지를 위해 몇 마디 조언을 해주시고는 한 해 고생 많으셨다며 집집마다 황금향을 돌리신 모양이었다. 아이고 참 언젠가는 나도 뭐라도 돌려야 할 것도 같다. 사실 볕도 들지 않아 반지하나 다름없는 이 방이 이제 좀 지긋지긋하기는 하다. 내 육체적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집을 떠나겠지. 그렇게 나쁜 기억들을 묻어두겠지. 하지만 여기 살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첫 돌 떡과 황금향, 게시판에 적혔다 사라진 따뜻한 문장들은 남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황금향이 참 달고 시원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근황(23.12.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