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근황(24.03.27)

상선약수

노자께서는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고 하셨으니, 물 같지 않은 것은 최고의 선이 될 수 없다고도 하겠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가져다주면서도 결코 다투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흐르니 세상 순리를 체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주말이었나, 하수구를 향해 흘러내려가야 할 물이 화장실 바닥에 여전히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최고의 선과는 거리가 먼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겨울철 상수도가 언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하수도라니. 최악은 물과도 같다. 얼어버린 물, 흐르지 못하는 물. 위로 솟는 물, 역류하는 물.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공기를 제거하여 막힌 곳을 뚫어내는 가장 원초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흔히 뚫어뻥이라 부르는 도구-사실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겠다-를 마치 보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하게 부여잡고 하수구에 검강을 내질렀다. 하지만 기껏해야 변기나 뚫던 검술이 어찌 광활한 하수구를 갈라내겠나. 하수구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입으로 뻐끔뻐끔 물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인터넷을 뒤져 용하다는 하수구 클리너를 사 왔다. LG 생활 화학의 기술자들이 만들어낸 이 제품은 분명 통할 것이다. 나는 그 기술자들을, 그들의 학위를, 그들이 연구실에서 보낸 시간들을 믿기로 했다. 하수구 위에 플라스틱 용기를 조심스레 올려놓고 약봉투를 쏟아 넣었다. 1시간쯤 후에 확인하면 된다는 설명서를 보고, 머지않아 항복하고 제 역할로 돌아갈 하수구를 비웃어줬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내가 마주한 것은 다시금 물로 가득한 화장실이었다. 플라스틱 용기는 둥둥 떠다니다 변기 밑에 처박혔고, 하수구는 연신 승리의 물거품을 뿜었다.


이제는 내 할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에 배관공을 모셨다. 그는 내시경을 밀어 넣더니 기름때로 인해 공용 배관이 막혔으며, 이를 스프링으로 뚫어낸 후 배관을 막고 있는 기름때를 갈아낼 것을 추천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관공에게도 문제의 하수구는 제법 난적이었는데, 우선 20m가 넘는 거리를 스프링을 넣어 뚫어내야 했다. 그리고 기름때를 갈아내다 장비가 부서지기도 했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그는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실시간으로 장비를 수리하며 기름때를 모조리 갈아냈다. 나는 그 모습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군역 시절 부대 행정보급관이 미군 창고에서 훔쳐온 나무로 테이블을 만들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모습에는 분명 미학이 있다. 그것은 역사에 기록되지는 못할지언정 인간의 삶 가까운 곳에서 인간을 돕는 노동자/기술자들만이 가진 아우라다. 그는 진정한 전문가였다. 기껏해야 연구실에 앉아서 세상에 도움도 되지 못하는 쓰레기같은 최적화나 고민하는 나보다 수십 배 강인했고 아름다웠다.


신발과 양말은 다 젖은 지 오래고 때로는 바닥에 엎드려 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결국 그는 고압 물 세척 없이도 배관을 깨끗하게 돌려놓았다. 애초에 배관이 수평이 맞지 않아 기름이 쌓이기 좋은 것이라며 진단도 내놓았다. 기름기 있는 음식물을 싱크대에 버릴 적에는 충분한 물을 흘리는 것이 좋다,라는 리빙 포인트를 전수하기도 했다. 아무튼 하수구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을 다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아아 최고의 선은 물과도 같다. 흘러가는 물, 순행하는 물. 젊어서 장사 끝에 5억 빚을 지고 배관공 일을 시작했다는 그가 “세상에 안 되는 일 없더라구요.” 웃으며 이야기할 적에, 나는 이 분 역시 물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상선약수다. 최고의 선은 물과도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근황(24.03.0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