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약사 찬가 (24.10.16)
<사조영웅전 2024> 봤다. 처음 보는 김용 작품 세계인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60년도 넘은 작품인데도 계속 감탄했다. 첫번째 무, 첫번째 협이라는 평가가 과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답답하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사조영웅전이 다루는 ‘협’이란 사실 전혀 민중을 구원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구처기와 가진악 같은 인간이 득실대면 그게 협일까? 대환장 파티라는 말도 모자란다.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애송이와 얼뜨기는 그야말로 지옥이다. 심지어 주인공인 곽정을 보다보면 절로 ‘어휴 이 씨발…’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황약사! 도화도주! 황용 아버지! 일대종사! 그 분이 있어 행복한 것이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황약사는 내가 본 중년 남성 캐릭터 중 최고다. 무공실력은 천하오절인데, 그 외에도 예술, 천문, 진법 등에도 두루 밝다. 그는 도화도라는 복숭아 나무 가득한 섬에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규율은 엄격한 것으로 보이나 적어도 그들을 아끼는 마음만은 분명하다. 그는 먼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남겨진 딸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대외적으로 그는 괴팍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어 별명 역시 동쪽의 사악한 자라는 뜻의 ‘동사’인데, 실제 사악한 성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누명을 써도 해명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신경쓰지 않기에 악명을 즐기며 살아간다.
황약사를 연기한 주일위 배우는 상당히 멜로 재질의 외모와 발성이다. 외모는 구교환과 김병옥을 묘하게 섞어놓은 것 같은 외모인데, 눈빛만큼은 깊고 정하다. 발성은 부드러우나 강단이 있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게 해준다는 취생몽사를 마시며, “잊는 것은 두렵지 않다, 잊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이야기하는 황약사의 모습은 단연 압권이다. 극 중 황약사의 삶은 모질게 굴었던 지난 날로 인해 떠안아야 하는 슬픔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는 일대종사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며, 강호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해야할 도리를 잊지 않는다. 먼저 떠나간 아내와 남은 딸은 가진 아버지들이 대개 그렇듯이, 황약사 역시 전형적인 딸바보다. 황용을 향한 그의 마음은 깊고 수척한 슬픔 사이로 가끔 보여주는 미소가 되어 마음을 울린다.
양강의 간계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 쓰고 전진칠자 및 가진악과 맞서는 황약사는 진실을 요구하는 그들을 귀찮아하며, “니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런 것이다.“ 냉소한다. 그의 냉소는 괴팍한 성질머리와 고고한 정신이 결합하여 탄생한다. 스스로 능히 세상으로부터 등돌릴 수 있는 자의 여유일뿐, 범부들의 회피나 도망 또한 절대 아니다. 세상 모두를 죽여도 자기 사람만은 지키려는 자, 이미 등진 세상이라면 돌아보지 않는 자, 괴팍하여 외로우나 스스로 고귀해진 자, 다들 한 번쯤 꿈꿔보는 것 아닌가? 그 마음을 달래는 것만으로 아직도 무협은 유효하다. 황약사는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