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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홍시 Jul 20. 2021

잡문 121 - 빠져든다는 것

쓰레기장이 된 집을 놔둔 채 나는 쓴다.

3일간의 일러스트 페어가 끝난 후에 나는 비로소 10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있었다.

깨어 보니 나는 혼돈의 카오스와도 같은 집에 누워 있었다.

페어가 끝나고 정리할 짐이 잔뜩 있었는데,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짐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와중에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은 보고 싶어서, 결국 영상 몇 개를 연달아 보다가 잠에 들고 말았다.

왜 짐 정리는 할 수 없는데 유튜브는 볼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짐 정리를 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지만 유튜브를 보는 것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 알게 된 어느 유튜브 채널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가히 덕질이라고 부를 만큼의 열정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렇게 또다시 덕질이 시작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좋겠다.


나는 덕질이 정말 가성비가 좋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마 무시한 돈을 쓰면서 덕질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적은 돈으로도 아주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덕질이다.

예를 들면 영상이나 짤들을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고 순식간에 행복의 강물을 헤엄칠 수 있는 것이 바로 덕심의 힘이다.

그 행복의 정도는 연애 초반의 그것보다도 높은 수준이라고 확신한다.

거기다 연애처럼 감정 소모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덕질의 행복은 정말이지 브레이크도 없이 힘껏 내달리는 것이다.

덕질의 대상이 꼭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이 될 수도 있고, 드라마나 영화가 될 수도, 또는 만들기나 악기 연주 같은 취미생활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온 힘을 다해 빠져들고 싶은 것.

틈만 나면 보고 싶거나 하고 싶고 호기심을 가득 품게 되는 것.

그것들이 모두 덕질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또 침대 속에서 눈만 뜬 채로 그 유튜브 채널의 영상 몇 개를 보았다.

킬킬대며 겨우 유튜브를 끄고 나서야 나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웃으면서 시작하는 하루.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발에 차이는 온갖 짐들을 애써 무시한 채 냉라면을 끓여 아침식사를 했다.

어찌나 짐 정리를 하기가 싫은지, 이불 빨래를 하고 택배를 부치고 커피타임을 가지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짐을 풀기 시작했다.

팔다 남은 재고들, 각종 집기류가 잔뜩 나왔다.

생각보다 많이 팔린 엽서들과 생각보다 많이 팔리지 않은 스티커들.

일러스트 부스도 아니고 문구 부스도 아니고 도서 부스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으로 페어에 참가했기 때문에, 재고의 종류 또한 다양했다.

한창 정리를 하다가 내 책의 샘플을 펼치고는 또 한참을 읽었다.

내가 쓴 글인데도 시간이 지나서 읽으면 남이 쓴 것 마냥 새롭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낸 책이라 지금보다 서툴지만, 또 그 점이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물론 이건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책이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 판매중지 신청을 한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내 그림이나 글이 꽤 마음에 드는 편이다. 타인의 것과 비교하지 않을 때에는.

타인의 글이나 그림을 보면 당연하게도 비교하게 되고, 그럼 나는 그들의 재능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질투와 부끄러움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일러스트 페어는 두 번째 참가인데, 지난번 참가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의 부스를 보고 나니 내 부스가 난잡하고 초라해 보여 괜히 시무룩해졌다.

너무 잘 만든 굿즈들, 너무 예쁜 캐릭터들, 싹싹하기까지 해서 다른 부스들에 인사를 돌리는 사람들.

거기다 나이도 다들 어려 보였다.

나는 누구도 타깃으로 잡지 못한 부스에 혼자 멍하니 앉아서, 한없이 아마추어적인 나의 창작세계에 대해 고민했다.

글도 쓰고 만화도 그리고 그림도 그린다고 말은 하지만 나는 그 무엇에도 완전히 빠져들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인스타 피드는 정돈되지 못하고, 나의 브런치에는 완결되지 않은 매거진들이 잔뜩 있고, 내 부스에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수준을 갖추지 못한 책과, 엽서와, 문구류가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사실 최선을 다 하기가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가 띵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나였다.

최선을 다 했다가 정말 안되면, 최선을 다 했는데도 진짜 안되면 그때 나는 너무나도 상처 받을 것 같다.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핑계가 생긴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내가 최선을 다 하면 더 잘할 수 있어. 더 잘 될 수도 있어.'

사실 내가 한 창작들 중에 대중의 평가가 좋았던 것은 거의 없다. 아니, 평가를 받을 만큼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 만화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감을 얻었고,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문구류 또한 반응이 미미했다.

나의 모든 창작물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브런치에서 활동한 지 시간이 꽤 되면서 2600명이라는 독자를 보유하고는 있지만, 사실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50명, 아니 어떨 땐 3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당연한 얘기다. 만화 그렸다가 글 썼다가, 기분이 별로면 또 몇 달 쉬었다가 하는 작가를 꾸준히 봐주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내가 최선을 다해 글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가. 그렇지 않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이 초고다. 한 번에 스윽 써서 올리는 것이다. 일기장처럼.

책에 쓴 글은? 마찬가지다.

만화도 페어 준비도 그 무엇도.

나는 어느 것 하나도 깊이 애정 하는 마음으로 빠져들지 못하고, 최선을 다 하지 못 했다.

살면서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이라곤 연예인 덕질밖에 없을 것이다.

덕질하듯 창작을 했더라면.

눈이 절로 감길 때까지 영상을 보듯이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더라면.

그렇게 빠져들고 스며들고 그것과 하나 되어 존재할 정도로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 했더라면.

나는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최선을 다 했더라도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두려운 것은 바로 그것이다.


여전히 집을 제대로 치우지 못한 채 나는 쓴다.

예전에 내가 왜 창작을 하는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말했다.

내가 하는 말에 아무도 답이 없다면 그것은 메아리도 치지 않는 곳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들어주는 이 하나 없는 데서 말을 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고독한 일이라고.

물론 들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내 글과 그림이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계속 그다지 반응이 없는 글과 그림을 창작하는 일에 나는 조금 지쳐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이 일에 완전히 빠져들어 최선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나의 재능 부족과 대중적이지 못한 취향 때문일까.

모르긴 몰라도 결과와 상관없이 어쨌거나 한 번은 정말 잠도 못 잘 정도로 진하게 빠져들고 싶긴 하다.

말 그대로 '덕질'하듯 말이다.

너무 좋고 재밌어서 심장이 쿵쿵 뛸 정도로.

그렇게라도 한다면, 뭐가 되든 안되든 지금보다는 덜 지칠 테니까.


최선을 다 하는 것에 겁을 내지 않고 힘껏 빠져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는 나의 창작물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결국엔 짐들이 널브러진 채로 맞은, 까맣게 물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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