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씨 Sep 06. 2019

처음은 늘 그렇게

새로운 시작 앞, 진부한 나를 발견하더라도




1.

세 번째 통장 이야기

"너 또 통장 만들어?"

"이번엔 진짜 모아보려고."

세 번째 통장을 개설하고 온 친구는 지난번과 같은 표정으로 빳빳한 새 통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어느 겨울, 친구가 나에게 새 통장 하나를 맡긴 사실이 정확히 기억났다. (그 통장은 보라색이었고 오늘 본 통장은 초록색이다.) 그때 왜 나에게 통장을 주냐고 물었더니 그 통장이 현금 통장 (반드시 통장이 있어야만 현금 인출이 가능하다 )인데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모일 새도 없이 돈을 쓸 거라며, 자신을 믿지 못해 맡기는 거란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매달 이체할 거라고. 100만 원이 모이면 다시 찾아가겠단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받아두겠다며 나는 서랍 한구석에 보라색 통장을 담아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는 당시 해외에 거주 중이었는데 통장을 받아가겠다고.

"벌써 다 모은 거야?"

"그게 있잖아.. "

자세하게 묻지 않았고, 나는 한국에 있는 엄마께 연락을 드렸다. 사나흘 뒤 친구는 초콜릿과 젤리를 한 아름 사들고 쭈뼛쭈뼛 통장을 찾아갔다고 엄마께 전해 들었다.


잠시 이 사건이 생각난 나는 친구의 새로운 초록색 통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 하냐고, 내 말 듣고 있냐고 다그치는 친구의 얼굴에서 '딱 그 겨울, 나에게 통장을 건넬 때의 표정'을 발견했다. 매달 꼭 저금을 하겠다는 결연함, 반드시 목표액을 채우겠다는 패기, 이번에도 그러지 못하면 나는 인간도 아니라는 여전히 같은 레퍼토리의 자책에 만약 실패하면 나에게 밥을 사겠다는 새로운 조약과 더해졌다. 나 역시 같은 표정과 문장으로 진심으로 친구를 응원했다. 아직 밥 사겠다는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잘 모으고 있으리라 믿어본다. 친구야, 밥 안 사도 되니까 이번엔 잘해봐.



2.

동생의 다이어리

책상 앞에 한참을 진득하게 앉아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 내내 뭔가 부스럭댔다. 슬며시 방에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다이어리 하나와 여러 색의 펜이 보인다.

"새 다이어리 샀구나."

그렇게 한참, 동생은 밤이면 뭔가를 끄적이는 것 같았다. 쉽게 싫증을 내는 녀석인데 이번에는 꽤 오래 쓰네. 어느 날, 청소기를 밀던 나는 책꽂이에 꽂힌 분홍색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뒤를 한 번 쓱 돌아보고는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오! 얘 만났구나, 이거 먹었구나, 이 영화 봤나 보네, 이건 뭐지. 몰래 훔쳐보는 스릴을 만끽하며 여러 장 넘겼다. 엥? 두 달치밖에 없어? 이게 끝이야?


그날 훔쳐본 다이어리는 열 장 남짓. 지금은 동생이 다이어리를 쓰는지 안 쓰는지, 매일 쓰는지도 잘 모르겠다. 얼핏 쓰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색 다이어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첫 장 첫 칸을 채울 때의 설렘을 알기에, 동생아! 이번엔 훔쳐보지 않을게.



새로운 시작 앞, 진부한 나를 발견하더라도

방학이 끝나고 개강을 하니 새 시간표가 생겼다.

또 새로운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하겠다며 필라테스 학원에서 수강증을 받아왔다.

가을인데 새 옷 사러 가자는 친구의 문자를 받았고, 느지막이 휴가를 떠난다는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그때 마침 나는 방 정리 중이었다. 정리를 시작했다 하면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다. 본능적, 습관적으로 새로운 시작 또는 사건을 앞두면 방 청소를 하는 나였다. 일종의 의식 같은 거랄까. 굳이 (전혀 심각하지 않은) 서랍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다. 내일 흩뜨릴지라도, 다음 주에 난장판이 될지라도 말이다.


책장을 정리하다 집어 든 책 한 권에 낯선 북마크가 꽂혀있었다. 이걸 언제 읽었더라?

그 옆에 꽂힌 어떤 공책은 첫 장과 달리 뒤로 갈수록 휘갈겨쓴 글씨가 가득했다.

새 책은 이내 헌 책이 되기 마련이고, 큰 맘먹고 산 새 폰엔 어느새 금이 갔고, 지난가을에 산 옷은 쳐다도 보지 않지만 오래간만에 다이어리에 적은 오늘은 참 뿌듯하고, 새 차는 아니지만 새로운 한 주를 위해 시원하게 세차를 한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여러 권 있지만, 서점에 들어설 때면 여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새 책 한 권을 들고 나온다. 끝까지 쓸 수 있을지 나를 믿지 못하지만 새 다이어리를 살 땐 여전히 기록왕이라도 될 듯한 패기가 가득하다. 복근을 향한 나의 열정은 헬스장 회원증이 빳빳할 때까진 불타오르며, 오래간만에 프로필 사진과 메시지를 바꾸며 새로운 기분전환도 해본다.


설령 새로운 물건과 새로운 시작 앞의 내가 진부하다 느껴질 지라도

굳은 결심과 새로운 다짐, 변화와 전환이 아로새겨진 '첫 마음'은 예외 없이 설렌다. 그래서-



모든 시작은 응원받을 권리가 있으며,
모든 처음은 두근거릴 의무를 지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