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공허함, 싱거운 허무함
알람 설정을 해제하자, 일어난 일들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란, 디지털(digital)과 해독(detox)의 결합어로, 각종 전자기기와 인터넷, SNS 등에 대한 중독으로부터 벗어나 심신을 치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디지털 단식이라고도 불립니다.
스마트폰, 인터넷, 게임 중독에 빠지게 되면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건강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디지털 디톡스는 반드시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넷 중독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으로, 디지털 디톡스가 시급히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성균관대학교 학술정보관 웹사이트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하고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사는 동안에는 분명 불행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나 스스로 그랬던 기억은 아주 사라져 버렸다. 대신 내가 그간 즐겼던 무지성의 자극에 대해 감당해야 할 큰 것이 몰려왔다. 찰나의 자극에서 나온 가짜행복이 차지하던 나의 시공간에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아있었다.
공허함을 채우고,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했다. 일단은 조금은 귀찮아했던 일들을 해보는 게 어떨까- 했다. 사실 귀찮다는 것은 너무 편하고 당연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다시 그것들을 귀하게 대해보는 것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다시 밖을 보고, 다시 글을 쓰고, 다시 사람을 가까이했다. 물론 그것들이 주는 피로가 있기는 하지만, 늘 전자기기가 주는 피로보다는 나았다. ‘혹시 내가 피하고 싶어서 디지털 세계로 숨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 어쩌면 조금은 비겁했던 나의 한 면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양파를 썰고, 단호박을 까고, 콩을 불려 음식을 만들었다. 직접 내 손으로 양념을 만들었다.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맛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시장에서 고른 대파, 양파, 마늘이었다. 깐 마늘도 아니었고, 세척 당근도 아니었다. 채소에 잔뜩 묻은 흙과 투박한 껍질을 벗기며 하나하나 손질을 하고 있자니- 내 손 끝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일부러 싱겁게 만든 콩나물 국이 맛있었다. 카피라이터 박웅현 님이 <책은 도끼다>에서 이야기했던 그 신선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콩나물 한 줄기를 씹으니 줄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짭조름한 물이 새어 나왔다. 모든 요리가 그랬다. 짠맛이 걷히고 나니 채소의 맛이 느껴졌다.
양치와 세수를 오래 했다. 얼른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기에 얼른 끝내 버렸던 양치와 세수를 더 천천히 해보기로 했다. 천천히 가는 시간을 느끼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기록학자 김익한 교수님이 이야기했듯 좋은 기록이란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서 가장 간결한 나의 언어로 만들어 두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 떠오르는 바람에,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양치를 하다가, 하루 중 가장 기분 나빴던 일이 떠오르는 날엔 지체 없이 운동을 하러 가버렸다. 내가 육체적 여유가 없으니, 남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받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 생각해서다. 추워질수록 운동을 하러 가는 그 짧은 길이 길게 느껴지는 날이 많아지기는 해도 역시 시작하기 어려운 일은 끝났을 때 그 가치가 보인다. 덕분에 나는 나 스스로가 두 배로 자랑스러웠다.
허무함이 생각보다 싱거웠지만, 이내 그 맛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공허함에서 싱싱하고 맑은 향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