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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oker Oct 30. 2017

<수성못>,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휘청거림

인물, 공간, 사회에 대하여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보게 된 <수성못>.

대중영화 지친 나에게 오래간만에 이것저것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작년에는 KAFA 영화제에서 <소셜포비아>를 보고 생각에 잠겼었는데 올해에는 우연히 찾아온 <수성못>이라는 영화 덕에 이렇게 다시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 타기를 하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대구의 수성못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1. 영목과 희정, 삶과 죽음, 빛과 그림자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한 명은 자살 카페를 운영하고 자살하기를 원하는 영목.

한 명은 자살 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이 편입을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는 희정.

원래대로라면 마주칠 일 없었던 이 두 인물이 하나의 사건으로 엮이면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그 하나의 사건은 수성못에서 일어난 중년 남성의 자살사건.

그 자살 사건에 의문을 가지고 야간에 촬영을 갔던 영목은 오리배 타는 것을 도와주는 아르바이트생인 희정이 자살한 남성에게 구명조끼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빌미로 그 둘은 자살방지센터에 가서 자살자들의 인터뷰를 하게 되고 희정은 영목을 반강제로 도와주게 된다.

이때부터 그림자가 즉 죽음이 희정의 삶에 개입한다. 

희정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죽음을 택하는 인물들은 모두 관심종자이며 그들을 굉장히 한심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즉 온전히 빛에 있었던 인물인 그녀가 영목과 그와 함께하는 인터뷰를 통해 그림자에 대해 점차 알아가게 된다.

하지만 희정은 그림자에 대해서 알아가기만 할 뿐 그것들을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희정은 어디까지나 캠코더 '밖'에 있는 관찰자이며 그것들을 기록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희정은 자신이 직접 자살을 직면한 후에야 그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2. 희준, 빛과 그림자 사이 어딘가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희정의 오빠(사실 둘 다 서로에게 반말을 써서 동생인지, 오빠인지, 쌍둥이인지 잘 모르겠다) 희준이다.

이 희준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또 다른 축으로서 작용한다.

처음에는 그저 상투적인 여자 주인공의 한심한 남자 형제 정도의 역할인 줄 알았던 희준이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점차 입체적인 인물로 바뀐다.

영목이나 희정과는 별도로 움직이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도 주지 못하지만 이 희준이라는 인물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물리적으로는 희정 즉 삶과 빛에 더 가까이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삶과 죽음 사이를 서성이는 인물이다.

아니 사실 서성인다기보다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부동(不動)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이 부동성은 이 인물이 자살을 선택하기 전까지 이 인물을 다른 인물들과 유리시킨다.

삶을 향하든 죽음을 향하든 '치열하게' 움직이는 희정과 영목과는 달리 희준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희준의 그 치열하지 않음, 즉 부동성을 희정은 싫어한다.

그런 맥락에서 희정은 희준에게 "치열하게 살아라 치열하게"라는 대사를 날린다.

군대를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계기로 이 인물은 드디어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죽음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은 영목과는 다르다.

영목이 죽음에 대한 치열함을 가지고 있다면 희준은 죽음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 강렬하게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삶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다.




3. 치열하게 사는 것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치열함' '열정' 따위를 강요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치열함과 열정을 가지고 겪는 일들로부터 오는 모든 아픔을 당연하게 여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우리 사회는 치열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루저, 패배자, 부적응자 등으로 낙인찍는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것에 대해 공감하지 않고 그들의 자살을 방관하고 한심하게 보는 것, 이것이 바로 희정의 관점이다.

하지만 희정의 관점은 현대의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것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영목은 희정에게 묻는다.

'죽음을 발아래 두고 일하는 기분이 어떠냐'라고.



4. 수성못

영목이 저런 대사를 치면서 카메라는 수성못을 비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장소, 그리고 영화 내에서도 누군가가 자살한 장소에서 사람들은 치열하게 페달을 밟으며 오리배를 탄다.

영목의 말 그대로 우리는 죽음 위에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수면 아래, 즉 삶의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오로지 앞만을 자신의 목적지만을 향하여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오리배는 아무리 열심히 페달을 밟아도 수성못이라는 곳을 떠나지 못한다.

이것이 대다수의, 다시 말하면 희정의 삶이다.

자신이 열심히 하면 수성못으로 대표되는 대구라는 공간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던 희정이 사실 자신도 한 척의 오리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희정이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물 위에 있는 삶에서 물아래에 있는 죽음으로의 관점의 변화에 기인한다.

영화가 수성못 물아래에서 시작해서 물 위로 올라오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5. 나가며

영목도 희정과 희준도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인물들이다.

그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

삶을 선택했지만 죽게되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살게되는 그러한 모습들은 영화를 단순히 삶과 죽음, 빛과 그림자로 나누는 것을 힘들게한다.

빛이 때로는 그림자가 되고 그림자도 때로는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흔들림을 이 영화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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