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왓챠에서 <주토피아>를 다시 봤다.
아마 국내에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드물 정도로 흥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이 <주토피아는>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글을 써보고 싶었으나 현실에 치여 이제야 키보드를 두드린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 귀여운 동물들의 수사극 정도로 기억되는 <주토피아>를 다시 살펴보자.
이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약간은 노골적으로 주제를 던지는 영화이다.
주디가 어렸을 적 하는 연극을 통해 관객들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들이 공생을 하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콘셉트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공존 안에서 각각의 동물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추구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연극 안에서는 그랬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여우 기디온이 초식 동물들의 티켓을 빼앗고 괴롭힌다.
이에 저항하던 주디는 뺨과 마음에 모두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디온은 주디에게 초식동물들을 모욕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닉도 어렸을 적 초식동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입마개를 하지 않은 여우는 믿을 수 없다”며 입에 입마개를 강제로 하게 되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이 두 등장인물의 과거를 통해 우리는 <주토피아>에서의 평등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토피아>의 평등은 제도로는 정착이 되어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인식으로는 정착되어 있지 않다.
주토피아는 영화의 설정 상 동물들이 사는 대도시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동물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주디가 기차를 타고 이 주토피아에 처음 들어가는 장면에서 그려지는 이 공간은 정말 하나의 낙원을 보는 듯하다.
그곳에서는 육식인지 초식인지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모든 동물들이 자신들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주디가 주토피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육식동물들이 자신의 공격성을 되찾고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 육식동물만이 공격성을 되찾는 바람에 이 사건을 수사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주토피아에서는 초식동물들과 육식동물들의 대립이 고조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워 보였던 주토피아에서도 외부의 사건을 통해 편 가르기가 즉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주디가 어렸을 적 했던 연극의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연극의 무대에서는 모두가 평등하지만 연극이 끝나면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주토피아 역시 표면적으로는 낙원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차별과 불만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주토피아는 영어로 Zootopia라고 쓰며 단어를 보면 알 수 있듯 동물원을 뜻하는 zoo와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를 합친 단어이다.
즉 유토피아의 동물 버전인 셈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원래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인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로 ‘없는(ou-)’, 이라는 단어와 ‘장소(toppos)'를 합쳐 만든 단어이다.
즉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 없는 곳이 된다.
이를 주토피아에도 적용해보면 결국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낙원이 실제로는 없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낙원이 차별과 편 가르기로 인해 주토피아가 진정한 낙원이 아님이 밝혀진다.
하지만 사건의 배후가 초식 동물의 대표주자이자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양, 벨 웨더임이 밝혀지면서 이 영화는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이를 통해 동물들은 결국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을 편 가르기 하는 것이 잘못됐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들 간의 차별뿐 아니라 다른 차별들도 등장한다.
크기가 작은 토끼인 주디가 경찰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토끼에게 귀엽다고 하거나 여우에게는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는 등 크고 작은 차별이 주토피아에 산재되어있다.
영화에서는 이 차별을 멋지게 깨부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토끼임에도 엄청난 사건을 해결한 주디와 교활함의 상징인 여우임에도 정의로운 일을 해낸 닉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쥐임에도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스터 빅과 순함의 상징인 양이지만 모든 일의 흑막이었던 벨 웨더도 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초식과 육식이라는 큰 차이뿐 아니라 크기, 성별, 외적 특징이라는 차이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진정한 평등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이 영화는 보고 서장의 입을 빌려 세상은 다른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래가 아닌 노력이 필요하다.
애당초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이 세상에 없는 세상 즉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다만 가젤의 노래처럼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해봐야 한다.
유토피아란 하나의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로 가기 위한 경로에 있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Try Every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