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도 생각나는 건 엄마의 당혹스러움이었다.
원래 엄마는 시크의 끝판왕으로, 나에게는 무척이나 가혹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결과가 나오자마자 쓰러져 울고 있으니,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평소에 날 아끼던 아빠가 더 호통을 쳤다. 울면 해결되는 게 있냐고, 일어나서 대책을 세우라고 하셨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낙담한 딸이 실컷 울게 좀 놔뒀으면 알아서 어련히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차 충원 2차 충원이 됐는데도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포기해버렸다. 아직도 엄마가 컴퓨터에 앉아서 3차, 4차 충원까지 챙겨 체크하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충원으로도 될 리가 없는 예비번호였기 때문에 나는 왜 그걸 모르냐며 그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내가 가려던 지방 국립대는 바로 그 시기, 서울 수도권과의 전철 신설로인 해 수도권 학생들이 많이 지원을 했던 상태였고, 과가 그리 인기과가 아니었음에도 문과계열에서는 제일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선생님께서도 나를 보자 한숨을 푹 내쉬며 재수할 생각이 없냐고 하셨다. 이미 반에 여러 명이 재수를 결정했다는 말을 들은 후였다. 나는 절대 별로라고 했다. 솔직히 나는 빠른 년생으로 조금 일찍 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일 년이라는 세월이 아깝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집안에서는 재수를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찌감치 그 선택권은 제외됐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알아봤다. 원래 우리나라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을 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유학을 가 버리자 하는 생각이었다. 중국 유학도 알아봤고, 프랑스 유학도 알아봤지만 아빠는 탐탁지 않아하셨다. 가더라도 고등학교 3년 준비했던 것이 아까우니, 혹시나 하는 때를 대비해 한국에서 학교는 어떻게든 입학을 하라고 하셨다. 유학이든 뭐든 2년간 준비하며 전문대는 졸업하라는 뜻이었다. 어물쩍대다가 시간이 흘러서 집 근처의 전문대는 이미 접수기간이 끝났고, 해서 제일 가깝고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니 의정부의 대학이 제일 가까워 보였다. 원서를 넣으니 합격이 됐고, 나는 '하나도'기쁘지 않은 마음으로 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대학은 무척 중요하긴 한 것 같다. 받는 자극, 친구, 기회가 달라진다. 스펙을 쌓고 학업적인 면에서 발전을 하려면 역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맞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전문대에서의 2년 동안 좋은 친구를 얻었고, (전과후에는)4년제에선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도 했으며, 무척 재미있게 생활했다.
처음 들어갈 때를 생각하면, 학교에 불안도 많았고 겉돌기도 했다. 그런데 어딜 가나, 정말 사람 하기 나름이지 않나 싶다. 4년제 대학이라야 내 인생이 옳은 길로 갈 것 같다고 생각했던 좁은 내 시야가, 전문대에 가게 되면서 무척 넓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