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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 준 Feb 26. 2022

90년대에 멈춰진 나의 음악 감성

아시아의 락 음악의 쇠퇴 속에 7-90년대 홍콩 음악을 발견하다.

고등학교 때 꿈이 락커가 되는 것이었다.

고3 6월 모의고사 때 439 점을 맞고 오랜만에 집에 가서 우리 세 가족에게 허락된 방 한 칸에 누워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어느 대학에 갈 것이냐고 하셔서 밑도 끝도 없이 정말 멋진 락커가 되겠다고 대답했었다.


수능이 끝나고 12년간의 주입식 교육을 마치고 심신의 긴장이 풀리고 연이어 과음을 하였고 몸이 쇠약해졌다. 게다가 의사의 3연속 오진으로 기침이 악화되어 폐렴으로 2주간 앓아 누운 후, 처음으로 과외를 시작하며 현금 약 3-4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종로3가 낙원 상가에 가서 15만원에 Vantage라는 메이커도 알려지지 않은 기타를 구매하게 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타로는 학교 단과대 동아리 공연에 2회 참여한 후, 약 5년 후에 5만원이라는 헐값에 팔게 된다.


유서깊은 중앙 동아리에 같은 과방 한 학번 선배가 있었고, 기타리스트에게 나를 소개하니 싸이월드에서 나의 퍼스낼리티를 보고 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오디션에서 보길 학수고대하고 있었으나 그 전날 과음을 해서 오디션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행히도 선배들이 별로 오지 않아서 눈치 보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뽑았는데 네가 왜 안 왔느냐는 선배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래서 1년간 여느 대학 신입생들이 그렇듯이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들었다) 매일 술 마시고 수업 안 들어가며 1년을 보냈고, 내 기타도 다른 과방에 들어가 있는 등 공공재처럼 굴러 먹다가 2학년이 될 무렵 신입생이 들어온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이름만 걸쳐 놓았던 단과대 동아리에 구걸하다시피 들어가 새내기 새로 배움터 공연과 새학기 길거리 공연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노래를 카피하는 것이 지겨웠고 내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래서 홍대를 기웃기웃하며 나같은 사회부적응자들을 모아 밴드를 결성했고, 더듬더듬 노래도 짓고 합주도 하며 함께 다듬기도 했다. 길용옥 선생의 화성학 책도 보며 입학 후 2년만에 처음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밤샘 흉내를 조금 내보기도 했다.

 

머 그렇게 홍대 밴드 활동을 하며 6번 정도 공연하고 내 인생의 총 무대 공연 횟수를 10번은 채웠다. 마지막 공연 때에는 페이도 받았다. 인당 5천원이었다.


그러다가 군대 다녀오고 복학하고 인생을 좀 제대로 살아 보려고 했으나 기초 통계학 중간 고사를 55점 맞아서 약 200명이 수강하는 대형 강의에서 하위 10% 안에 들었고, 복학 후 첫 학기 총 평점이 1학년 2학기 평점에도 못 미치는 등, 와 나는 정말 정신차리려면 한참 멀었구나-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빌빌 댔고 프로그래밍 수업 과제를 할 때에는 어떻게 해도 답을 못 찾아서 늘 친구들 과제를 베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구글링을 좀 하면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텐데 뭐 그런 것도 모르고 Help 메뉴도 제대로 이해 못해서 혼자 낑낑 거리고 있었으니 답이 나오겠는가. 그렇게 과제 하다가도 눈믈을 찔끔 흘려 보기도 하고, 본 전공은 대충 개판친 다음에 이중 전공이었던 중어 중문과로 넘어갔다.


중국어와 중문학은 너무 재미있었다. 청강으로 들은 전공 중국어 수업에서, 모든 수업에 참석하고 중간/기말 고사도 치루었고 이 때 수업을 듣고 하나하나 알아갈 때 정말 벅찬 떨림을 느꼈다. 물론 난 사실 당시 졸업해야 할 늙다리였기에, 새내기 또는 2년차들을 상대로 학점을 따는 것은 매우 수월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잠시, 한참 후배들에게도 곧 밟히게 된다. 거의 마지막 학기에 연극 활동, 밴드 활동 등을 하며 흥청망청 보냈고 심지어 기침, 콧물에 시달리면서도 축제에 놀러가고 술 마시러 다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회 생활한답시고 돈도 펑펑 썼고, 건강은 상하고 추억은 많이 만들었으나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지금까지 연락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중국 문화와 관련한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중국 음악에는 의식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졌었다. 조선족 출신이자 중국 락의 아버지인 최건을 중문과 수업을 통해 알게 되었고, 고려인 출신이자 가장 인기있는 뮤지션이었던 구소련의 빅토르 최하고도 바로 연결되었다. 역시 한민족의 음악적 자질과 최씨 고집이 한데 어우러져서, 면적 2천만 2백만 제곱 킬로미터의 구소련과 900 제곱 킬로미터의 중국 대륙을 온통 흔들었다는  아닌가?


중국에 있을 때에는 저작권의 문제 없이 온갖 음악들을 바이두에서 공짜로 들을  있었다. 최건, 뤄따요우, 왕페이, 또우웨이, 왕펑, 반광징 등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왕페이, 뤄따요우만 빼고는 거의 남성  음악이라   있다. 사실 이때 빅토르 최의 노래도 많이 들었다. 인턴하러 가는 길에, 먼지가 가득한 수공예 공방 거리에서 노동자들은 슬픈 눈으로 자욱한 먼지, 유리 가루 속에서, 고기 몇 점만을 얹은 수북한 밥을 콧물에 비벼 먹는  했고, 나도 빅토르 최의 슬픈 발라드를 들으며  사잇길을 걷곤 했었다.


이렇게 1년간 중국에서 어학 연수 및 인턴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가 중국 모처에 가서 한국인들을 만나 사업을 하려다가 거하게 실패하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한국에 돌아와서 중국 음악만 들으면서 살게 된다.


실의에 빠져서 혼자 집에 있을 , 중국 음악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비욘드의 하이쿼텐콩이라는 노래를 알게 된다. 사실  하이쿼텐콩은 중국 북경 표준어를 사용하는 밴드의 노래로서,  룸메이트 형이 굉장히 좋아하던 노래여서 나도 찾아서 들으려  것인데, 비욘드의 노래가 계속 추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어보니 이런 명곡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비욘드라는 8-90년대 홍콩 밴드에 대해서도 알게 되면서,  음악 감수성은 7-90년대의 광동어 음악에 한참동안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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