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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22. 2020

전역을 했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지 않지?

인생 웹툰, 주호민 <짬>

웹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딱 오늘처럼. 봄이 막 찾아와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그 토요일도 어김없이 당직사관은 해가 들었으니 침구류를 모두 들고나가 일광건조를 시키라고 했을 거고, 방송을 들은 장병들은 어김없이 욕을 하며 지시에 따라 매트와 침낭과 베개와 모포를 들고 연병장으로 나갔을 것이다.


2012년, 스물한 살 7월의 나의 최대 관심사는 군입대였다. 우리 학교 공대 선배들의 3-40%는 입대 없이 박사학위까지 공부하는 ‘전문연구원’이라는 제도를 활용해 스트레이트로 학교를 다녔다. 군대가 두려웠던 나 역시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으나, 박사학위까지 공학을 하게 되면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좀 겁나더라도 눈 딱 감고 21개월만 다녀와서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지, 기왕 공대에 온 거 가방끈 길게 늘어뜨릴지 고민하던 그 여름, 주호민 작가님의 <짬>을 만났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주호민 작가 본인의 군생활을 바탕으로 훈련병 입대부터 이등병, 일병, 상병, 병장을 거쳐 전역하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게 그린 웹툰이다. 마지막에 주호민 병장이 전역을 한다. 그토록 기다렸던 전역날인데, 왜 기분이 좋지가 않지?라는 문구와 함께 웹툰도 끝이 난다.


웹툰을 본 스물한 살의 나는 결심했다. 군대에 가기로. 귀여운 그림체와 민간인도 쉽게 읽히는 스토리는 군대에 대한 무서운 이미지를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무엇보다, 그 기분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전역을 했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그 기분. 웹툰을 다 보고 얼마 후 나는 입대 신청을 했고, 그해 9월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이등병 생활이 한창이던 때, 부대 생활관에서 <짬 2>를 만났다. 1편이 시간 순서에 따라 에피소드를 배치했다면, 2편은 ‘예비역들의 수다’라는 부제에 맞게 예비군 훈련을 마친 친구들이 군복을 입고 군 시절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내용이었다.

직접 군인이 되어보니 만화는 더 와 닿았다.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힘든 시절도 다 지나가서 안주거리가 되는 때가 오는구나라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신기한 게, 이 책은 아무리 병영도서관으로 옮겨놓아도 결국 다시 이등병 생활관으로 돌아와 있곤 했다.

어제, 만화카페에서 <짬>을 다시 봤다. 오랜만에 본 <짬>은 내 기억 속의 결말과 조금 달랐다. “전역했는데 왜 기분이 좋지가 않지?” 에서 끝이 아니었다. 8년 전의 내가 놓쳤던 부분이 더 있었다. 전역 후의 모습을 그린 외전이었다. 함께 군생활을 했던 만화 속 주인공 XX는 지금 무엇이 되어 어떤 일을 하고 있고, OO병장은 어디로 유학을 갔고, 자기는 이 모든 사람들을 추억하며 웹툰을 그리고 있다는 결말이었다.


친했던 선후임들 말고는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할 만큼 시간이 지났다. 밖에서도 꼭 연락하며 지내자던 사람들은 하나둘 연락이 끊겼고, 소수의 사람들과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주호민 님이 웹툰을 그리며 그 시절을 그리워했듯이, 나도 여유로운 주말이 되면 가끔씩 추억 속 사진들을 꺼내어보며 칠 년 전, 팔 년 전 그 기억들을 소환시킨다.

전역하는 날, 나는 기뻤다. 지긋지긋한 군복을 안 입어도 괜찮아서, 실컷 늦잠 잘 수 있어서, 이제 하고 싶던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들이 주어져서. 군인 신분이라는 보호막이 없어지는 건 불안했지만 어쨌든 인생의 2막이 막 시작되던 그때는 분명 설렜다.


애초 입대할 때 생각했던 전역날 “왜 기쁘지 않지?”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주호민 님의 <짬> 이 있었기에 과감하게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공학자의 길을 포기할 수 있었으니. 이 웹툰은 분명 나의 인생 웹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봄이 막 시작되려는 주말이면 나는 어김없이 일광 건조하던 그 날을 떠올린다. 전우(?)들이 떠오른다. 그때 나한테 정말 잘해줬는데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내가 미워했던 그 사수가 생각나 한없이 미안해지고, 내가 전역할 때 즈음 이등병으로 들어왔던 막내들도 벌써 전역한 지 3-4년이 지났으며, 부대에는 또 끊임없이 새로운 장병들이 들어오고 나가겠지 하는 생각에 절로 미소 짓게 된다.

그 시절이 그립다기보다는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십 대 초반의 젊음이 그리운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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