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Fin
14일의 순례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다. 취업이 되어 연수를 받기까지 1달의 여유가 있었고, 그중 2주는 순례길을 걷는데 썼다. 최초 계획은 중간의 메세타 고원 구간을 건너뛰고 하루 약 40km씩 총 500km를 걷는 것이었으나, 계획은 바뀌어 건너뛰는 것 없이 초반 구간인 생장~부르고스, 300km만 걷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루 이틀 걸어보니 애초에 40km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임을 알게 된 것도 있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동생 한 명의 말이 결정을 도왔다.
“한국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물어보면 ‘중간 구간 건너뛰고 완주했어’ 보다는 ‘아직 걸어둘 길을 남겨두고 왔어. 나중에 다시 갈 거야’라고 하는 게 더 있어 보이지 않겠어요?”
2주를 함께 걸어온 순례자들과 마지막 저녁을 같이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스페인 북부의 밤 열시는 초여름 새벽 다섯 시의 하늘처럼 파랬다. 잠시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걷는데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낯선이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순례자의 인사를 건넸다.
Buen Camino!
이 시간에 어딜 가냐 물으니 부르고스에서 까미노(순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간다고 했다.
“슬프진 않나요?”
“좋은 일로 돌아가요. 결혼하거든요!”
“와우, 축하해요! 사실 저도 오늘이 마지막 까미노였어요. 내일 집으로 돌아가요.”
“그것 참 안됐네요. 그치만 언젠가 다시 올 거잖아요."
"물론이죠."
"Buen Camino!”
“Buen Camino, for your life.”
그렇게 순례자들은 순례 이후 서로의 삶을 Buen Camino라는 짧은 인사로 축복했다. 짧았던 당신의 순례길이 결혼을 잘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당찬 뒷모습이 어쩐지 아름다웠다.
일행들과 에어비앤비를 잡아 마피아 게임을 밤늦게까지 했다. 날이 밝아오면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이들은 다시 앞에 있는 메세타 고원을 향해 나아가겠지. 새벽 세 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눈을 떠 길을 나선다. 적어둔 엽서를 테이블 위에 고이 남기고 어두워진 중세 도시의 터미널로 발을 옮긴다. 잠을 깨지 못한 눈꺼풀이 무거운 만큼 발걸음도 무겁다.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우선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로 향했다. 순례를 마치지 못한 자가 성당을 먼저 본다고 한 들, 순례를 마치고 그곳에 도착한 이들 만큼 감흥을 느낄 수 있을까. 조금은 허무할지도 모를 감정, 나는 아직 알 수 없을 그 감정의 1%라도 쫓고자 산티아고행을 택했다.
버스에 탔다. 2주간의 시간이 스친다. 짧았던 것도 같고, 집을 나와 공항에 갈 때 반바지를 입었나 긴바지를 입었나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꽤 오래 전인 것 같기도 하다. 남은 순례자들은 순례를 계속한다. 나는 순례자의 신분을 벗고 원래의 자리에 돌아간다. 애초에 계획이 달랐을 뿐인데, 아쉬움과 박탈감이 크다.
언젠가는 이 순례도 완성할 거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어쨌든 당시에는 가슴이 아팠다. 순례의 여정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일상으로 돌아가거든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적응하겠지만 어쩐지 그 적응도 슬플 것 같아 아팠다.
창 밖의 스페인 들판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안간힘을 썼지만 피곤은 이길 수 없었다. 눈꺼풀과 수 차례 싸움을 하며 자고 깨고를 반복하다 8시간이 지났다. 버스가 산티아고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순례길을 알리는 노란 화살표와 순례자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40여 일 대장정의 마지막 길을 걷고 있겠지. 목표가 눈 앞에 있다는 생각에 힘든 것도 달관했는지, 발걸음과 표정이 그 어느 순례자들보다 가벼워 보인다.
터미널에는 배낭을 멘 채 집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이 보였다. 모든 순례자들의 배낭에는 조가비 껍질이 달려있다. 순례를 시작하는 곳에서 야고보 사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조가비 껍질을 받는다. 그가 타고 있던 배에 조가비가 많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터미널을 나와, 성당을 향해 걸었다. 나는 슬리퍼를 다시 등산화로 바꿔 신었다. 배낭을 고쳐멨고, 등산 스틱을 쥐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 또한 2019년 여름의 스페인을 걸었던 순례자 중 한 명이다. 다시 순례자 기분을 내니 우울함이 조금은 가셔 살 것 같았다. 성당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순례의 종착지. 산티아고 성당 앞에서 노부부는 같은 배낭을 메고 아무 말 없이 끌어안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반려견과 함께 순례길을 완주한 젊은 여자는 늠름한 포즈의 까만 개를 자리에 멈추게 하고는 연인의 사진을 찍듯 흐뭇한 미소로 셔터를 눌렀다.
더러는 끝난 기쁨을 감추지 못해 사진을 찍었고,
더러는 끝난 허무함을 감추지 못해 눈물을 보였다.
더러는 초점 나간 표정으로 지나온 길을 회상하고 있었다.
2주밖에 되지 않는 순례는 부르고스에서 끝이 났다. 부르고스에서 산티아고, 550km의 여정을 남겨둔 채 버스를 타고 종착지에 도착했다. 억울함에 조금 눈물이 났다. 도착한 성당 앞에서, 800km를 걸어와 웃거나 울고 있는 저들의 심정을 100%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다. 순례자들과 한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그 넓은 광장에 남겨진 것 같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산티아고 대성당. 나에겐 남겨진 550km가 있다. 순례길을 마저 걷게 되는 그날까지 다시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아가야지, 그런 류의 깨달음이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아직은 물음표로 남겨진 순례길을 느낌표로 온전히 채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19년의 나와, 또 몇 년 후가 될지 모를 나, 그 접점을 부르고스와 산티아고 사이 어딘가에 남기고 왔다고 생각하련다. 구질구질한 미련을 가득 남겨둔 채 성당을 구경하고 마을을 돌았다. 차마 다 채워지지 못한 순례자 여권을 배낭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어떤 아름다운 것들은 미완성으로 남겨둘 때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