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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Mar 15. 2020

강강약약한 사람

강약약강한 사람

입사 이후로 두 번의 쌍욕을 먹었다. 첫 번째 들었던 쌍욕은 일을 시작한 지 채 삼 개월이 안되었을 때 고객사 과장에게 들은 “아 씨발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였다.


그날, 전화를 끊고 어찌할지 몰라 바로 윗 선배에게 찾아갔다.

“선배님, 저보고 씨발이라는데.. 어쩌죠?”

선배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그 사람, 그쪽 회사 팀장님도 포기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분한테 전화 오면 녹음부터 누르고 받아요. 언제 어떤 욕이 날아올지 몰라요. 그니까, 그쪽에 전화할 일 있으면 직접 하지 마시고 저한테 넘기세요.” 했다.


너무도 쉽게 상대방에게 비수를 꽂는 사람은 그것이 비수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 일이 잘 굴러간다고 믿으며,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제로도 그렇다. 그 과장이 우리 팀장님께 전화 한 통으로 랄지를 떨었더니 수개월 째 답보상태였던 일이 단숨에 해결되기도 했다. 골치 아프다, 그냥 빨리 해주고 말자, 하셨다.


반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상처로 하루 종일 앓기 마련이다. 일방적으로 당한 욕설에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가해자는 저쪽인데 애꿎은 피해자만 자기 능력 탓을 한다. 내가 좀 더 빠릿빠릿해서 말귀를 잘 알아 처먹었으면 나았을까. 그 날 오후 일정이 봉사활동이었기에 망정이지 업무였으면 제정신에 못하고 사고 쳤을 거다.


두 번째 쌍욕은 얼마 전 다른 고객사 부장의 “협조는 무슨, 좆까는 소리 하지 마세요”였다. 이 사람은 같이 업무를 하다 보면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 하는구나, 느낄 수 있다. 아랫사람들 여럿 퇴사하게 만든 걸로 유명하다. 욕도 두 번째 들으니 멘붕이 좀 덜했다. 하하. 예. 부장님. 알겠습니다. 저희 팀장님하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 팀 과장님께 갔다.


“과장님, 저보고 좆까지 말라는데 어떡하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의 과장님은 곧바로 항의 전화를 했다. 나는 다음날 “제가 욕을 했다면서요? 어제 말하다가 너무 흥분하기는 했는데 욕까지 했는 줄은 몰랐네.. 미안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라는 사과를 받았다. 솔직히 사과 같지 않은 사과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미우나 싫으나 계속 같이 업무를 해야 하는 파트너라는 생각에 “허허. 괜찮습니다.” 하고 말았다.


첫 번째 쌍욕을 곧이곧대로 먹은 후, 그 과장은 내가 전화를 걸면 무조건 반말을 했다. 본인이 요청할 게 있을 땐 가끔 존댓말도 하긴 하더라. 아무튼, 나는 그 반말과 기세 앞에 무기력해졌다. 더 굽실거렸고, 더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 과장을 대했다. 어쨌든 그 사람이 일을 잘 처리해줘야 나도 야근을 안 하니까. 전화를 거는 것부터 두렵지만 이번엔 욕 하지 말고 잘 넘어가 주기를 수없이 바랐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니 그 과장이 나에게 반말하는 것에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반말로 온 전화에 최대한 상냥하게 응대하며 업무를 요청하는 나의 모습에도 이상함을 못 느꼈다. 그때 알았다. 아, 이건 부끄러워할 일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사람이 되야겠다고 다짐했다. 한데 정작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위축되어 “제발,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심정으로 연락을 하게 된다.


약자에게 약한가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회사에서는 아직 막내이기에 나보다 약자는 없다고 치자. 고객사를 상대할 때, 사원급에게는 같이 목소리를 높이며 (업무적인) 싸움을 할 수 있어도 과장급 이상에게는 정작 정당한 요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곤 했다.


회사는 이성과 논리로만 굴러가지 않았다. 많은 영역에서 힘의 원리가 작용했다. 사원이 전화하면 안 된다고 잡아떼던 일도 과장이, 부장이 전화하면 너무 쉽게 해결되는 회사의 모습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사실 나 또한 그 힘의 굴레 앞에 무기력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꿈꾸어온 이상적인 자아상에 비해 현실 속 지금 나의 모습이 초라해 보인다. 나는 이 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부끄러우면서도 그 부끄러움 하나 이겨보자고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음에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는 데 그 안도감 조차 부끄러운 걸 어쩌나. 일이 굴러가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통할까. 영업의 세계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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