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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Oct 10. 2019

좋은 것만 하려다가는 소화 못하고 체하겠지.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3

순례 5일 차. 대상포진에 걸렸다. 오른쪽 갈비뼈 아랫부분에 포진이 길게 생겨 베드 버그에 물린 줄 알았다. 한데 그 부분은 순례길 오기 전부터 아무런 포진 없이 가렵기만 했다. 검색해 보니, 척추를 기준으로 한쪽 면에만 길쭉한 띄 형태로 생기면 대상포진이라고 한다. 아무리 긁어도 해소되지 않는 가려움. 가벼운 증상이 순례길의 고단한 일정과 만나 대상포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필 짧은 순례 일정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심각한 단계가 아니기를 바랐다. 하루하루의 걸음이 소중한 데. 목표한 곳까지 도달하려면 한 시간도 버리기 아까운 데.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길 위에서 더 번지지 않고 잘 치료받을 수 있을까. 순례길을 걸으며 자연 치유되지는 않을까. 겨우 5일 차인데도 걸어온 발자국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다. 지나온 도시들이 모두 아름다웠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되는 마음에 잠을 설쳤다. 얼마나 오래 꿈꾸어 온 순례길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되는 건가.

@Estella, Spain 2019

건조함도 극강을 달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로션을 아무리 발라도 각질이 계속 벗겨졌다. 입술은 부릅틀대로 터서 피가 나고 딱지가 졌다. 입 주변 피부도 계속 벗겨졌다. 지난번 기차 이후 처음으로 ‘집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내일 하루, 걷지 말고 병원에 가보기로 한다. 지금 병원에 가지 않으면 순례를 정말 멈춰야 할 수도 있으니까.


다음 날. 일행들은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1주일 가까지 같이 걸었던 정이 있는데 혼자 떨어지는 것이 꽤나 쓸쓸했지만 별 수 없다. 갈 사람은 가야지. 길 위에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멀어져 가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나는 알베르게(순례자용 호스텔) 호스트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병원에서 혹시나 순례길을 그만두라는 말을 듣더라도 나는 계속해야지! 다짐하며. 그 와중에 오레오 샌드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고, 월요일 오전 8시의 번화가 풍경이 너무 여유로워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적으로 맛있는 OREO 샌드. 한국 도입 시급.


* 순례객들은 일반적으로 한 도시에 하루만 머문다. 간혹 도시가 마음에 들어 연박을 하기도 하는데, 순례자들이 게을러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연박을 금지하는 알베르게도 있다.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스페인어 사전을 켠다. ‘대상포진’을 검색한다. Herpes zoster.. 에르뻬스 소스떼르.. 남미에 1년 있으면서도 쓴 적 없는 이런 단어를 쓸 기회가 오다니 인생 참 살아볼 만하다. 자칫 괴로울 뻔했으나 마인드 컨트롤이 된 것은 아마 스페인어가 가능하기 때문 아니었을까. 말까지 안 통했으면 난 정말, 울었을 거다.


복잡한 절차와 약 1시간의 기다림 끝에 의사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 제가 대상포진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어디 봅시다.”

“여기요.”

“아이고. 저런. 대상포진이 확실하군요. 순례 중이시죠?”

“네”

“초기단계니까, 처방해주는 약 먹으면서 컨디션 관리하시면.. 계속하실 수 있겠네요.”


Continuar. 계속하다. 머릿속에 그 단어만 맴돌았다. 이후에 의사 선생님이 여러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Continuar라는 단어가 너무 기뻐서. 까미노를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좋아서 집중이 안됐다. 약국에 들러 약과 립밤을 사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부터는 로션도 아끼지 말고 푹푹 발라줘야지.


의도치 않게 생긴 하루의 휴식 동안, 새로운 일행을 만났다. 나보다 하루 늦게 순례를 시작한 사람들이 열두 시 조금 넘어 마을에 도착했다. 열 명 가까이 되는 한국인들, 스페인 친구 한 명, 일본 친구 한 명, 그 외 유럽 친구들이 있었다. 이 일행들과 남은 순례길을 쭉 함께했다. 이 사람들 덕분에 순례길의 하루하루가 과하게 즐거웠으니, 대상포진이 만들어 준 이 인연은 분명 전화위복이었다.

새로운 일행과 밥을 먹고, 오랜만에 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알베르게 앞에 앉아 옮겨가는 그림자 사이로 사람들을 구경했다. 주민들은 순례자를 위해 기꺼이 미소 지으며 한마디 건넨다.


Buen Camino!(좋은 순례길 되세요!)


덕분에 다시 부엔 까미노 할 수 있겠다.

그래, 뭐. 마냥 좋은 게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다. 좋은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좋은 날 지나면 힘든 날 오고, 힘든 날 지나면 좋은 날 오듯 말이다. 계속 좋은 것만 하려다가는 소화 못하고 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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