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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Sep 01. 2019

순례길을 걸으며 하는 생각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2

엄청난 고민이 있어 순례길을 걸은 것이 아니다. 걷는 여행이 늘 해보고 싶었다. 정리할 생각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취업은 확정되었고, 더 이상의 걱정거리는 없었다. 순례자들은 통성명 후에 으레 묻는다.

“왜 순례길에 왔어요?”

나는 스토리 하나씩 갖고 온 대부분의 순례자들과 다르게 명확한 답이 없어서 “그냥,, 걷고 싶었어요.”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그래도 순례길을 혼자 걸을 때는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흘러갔다. 모두 붙잡아 기록할 순 없었으니 어렴풋한 조각들을 모아 본다.


과거에 대한 후회

예전에는 “후회 없이 사는 인생”이 좌우명인 적도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후회 없는’과 ‘인생’이 함께 나오는 자체가 모순이다. 평범한 나의 생각은 그렇다. 멘탈이 강해서 과거 따위 뒤돌아보지 않고 내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이라며 올곧게 밀고 나갈 줄 아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 분들은 정말 멘토로 삼고 싶다.


먼 과거는 후회로 회상할 만큼 생생하지 않다. 주로 가까운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를 했다. 가장 크게는 입사가 결정된 회사, 여기를 선택한 것이 맞을까에 대한 생각이다. 총 네 개의 회사에 합격했다. 결국 선택한 곳은 합격했던 회사들 중 기업문화도 연봉도 위치도 가장 좋은 회사였다. 다만 이전까지 큰 관심이 없던 제조업 분야였다. 나머지 세 개 회사는 그토록 좋아했던 중남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직무에 지원을 했으나 조건이 좋지 않았다. 기업 문화가 나쁘거나, 연봉이 적거나, 위치가 나쁘거나.

이 선택을 함으로써 나는 당분간 스페인어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전문 영역으로 쌓으려 했던 중남미에 갈 일도 없어졌다. 돈보다 꿈이 중요하다며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던 과거의 나는 선택의 순간에 또다시 조금 더 편하고 안정적인 길을 택해버렸다. 대학교 학과를 선택할 때와 똑같았다. 9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수학교육과와 전기전자공학과 사이에서 고민하던 열아홉의 아이는 좀 더 유망한 미래를 꿈꾸며 전기전자공학과를 선택했고 적성에 맞지 않아 학과 공부가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또다시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며 후회와 괴로움으로 시간을 채워가야 하는 것인가. 후회가 밀려온다. 기업문화 좀 안 좋아도 중남미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B사를 선택해야 했나. 보수 좀 적어도 전 세계를 무대로 공공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C사를 선택해야 했나. 과를 선택할 때처럼 직장을 덜컥 선택 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어차피 지나 온 선택은 바꿀 수 없다. 배낭여행을 하며 배우지 않았는가. 어디서 잘지, 뭘 먹을지, 투어는 뭘 할지, 누구와 동행할지. 수많은 선택과 지출을 거쳐야 하지만 그저 매 순간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믿고 뒤돌아 보지 않고 다시 배낭 짊어지고 앞으로 가면 그만이라고. 인생도 이러했으면 좋겠다고.


조금의 후회는 어쩔 수 없다. 후회는 후회대로 남겨두자.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회사에서 새로운 꿈을 또 발견해 보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멈추지 않고 고민하며 답을 찾아왔던 지난날처럼. 기왕 선택한 거, 안정적인 기반을 누리며 그 속에서 혹은 그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 이런 애매한 결론을 내리다 보면 중간 마을에 도착해서 아침 먹을 시간이 되어있다. 후회가 다 무슨 소용이냐. 눈 앞에 크루아상과 카페라테가 날 반기는 것을.


"아마도 후회라는 건 아름다운 미련이어라" (곽진언 - 후회)


취업이 어려워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골라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골라갈 수 있는 건 분명 행복이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선택을 고민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강요된 동정에 불과하다. 취업준비 시절을 거쳤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취준생의 마음과 상황에 크게 공감하며 응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정할 생각은 없다. 취준생 시절의 나 역시 동정받는 시선이 싫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믿음

‘산티아고’의 우리말은 ‘야고보’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묻혀있다. 특별히 종교적인 목적을 갖고 순례길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독교인’은 나를 이루는 가장 큰 정체성 중 하나이기에 걷는 내내 야고보의 삶과 그의 저작 ‘야고보서’를 묵상했다.


야고보는 ‘행동대장’ 느낌이 있다. 신약성경은 ‘율법’을 강조한 구약과 다르게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 구원에 대한 ‘믿음’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유독 야고보서만큼은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17, 새번역 성경)

나의 갖출 것이 다 채워진 후 남는 것으로 남을 돕는 일은 쉽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것이 부족한데도 남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이 진짜 행동하는 믿음인가. 나는 나를 채워 흘려보낼 것을 구해야 하나, 부족하더라도 남에게 흘릴 수 있는 믿음이 생기길 구해야 하나.


양자택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 ‘채움’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채움이 아니라 영적으로 충분히 채워졌는가에 더 달려있겠구나 라는, 역시 애매한 결론을 내려본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 충분히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 나의 객관적인 상황과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내 시간과 자원을 흘려보낼 수 있는 것 같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든다” 이런 무서운 말씀을 남긴 것 보면, 야고보도 무거운 짐 이고 지고 순례길 걷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를 만나고자 혹은 다른 여러 이유로 뙤약볕 내리쬐는 6월의 스페인을 걷는 이들을 보면 천국에서 아마 “행동하는 믿음을 잘 지키고 있군ㅋ. 마음에 들어!” 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복잡하고 고차원 적인 생각은 잠시, 대부분의 시간은 꽤 단순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고민을 하는 데 할애하게 된다.


오늘 점심은 뭐 먹지?

납작복숭아가 참 맛있던데 가는 길에 슈퍼가 나오면 꼭 넉넉하게 사두어야지. 스페인은 하늘이 참 예쁘네. 아이고 힘들다. 배낭을 던져버리고 싶다. 나는 뭐가 좋아 이 먼 땅까지 와서 이 땡볕의 고역을 즐기는 걸까. 근데 어제 OO형이 해준 제육볶음 진짜 맛있었는데 또 먹고 싶다. 또 해달라고 할까. 그 형은 요리를 참 잘해. 나중에 결혼하면 요리 잘하는 남편이 되어야지. 근데 누구한테 배운담. 독립하기 전에 엄마한테 요리나 잘 배워둬야지. 얼른 대도시에 가고 싶다. 거기는 라면을 팔겠지. 너구리로 먹어줄 테다. 오늘 묵게 될 알베르게는 가격이 저렴했으면 좋겠다. 주방 시설은 있을까? 없으면 순례자 메뉴 사 먹어야 할 텐데. 으. 돈 아깝다.



거창한 스토리가 있어 순례길을 온 사람도, 별 이유 없이 마음이 동해 순례길에 온 사람도, 결국에는 이 단순함의 늪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 생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 잠, 밥, 집, 친구. 가볍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


당신 역시 순례길을 걷게 된다면 이 가벼움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여전히 순례길의 그 가벼움이 그립다. 정확히 말하면, 가벼움과 무거움이 적당히 균형을 맞추어 ‘행복하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던 그 하루하루 순례의 일상이 무척이나 그립다. 올해 여름휴가와 연차를 모아서 11월쯤에는 남아있는 순례길을 더 걸어볼까. 못할 건 또 뭐람. 아, 그러고 보니 요리를 못 배우고 있네.

여전히 그리운 노란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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