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 지나 돌아보니, 아마도 그때.
멕시코시티였어. 혼자 힘으로 해외 배낭여행은 처음이었던 나는 매연 쾌쾌한 줄 도 모르고 이국 풍경에 반해 마구 싸돌아다녔지. 부족한 예산 탓에 가고 싶은 곳을 모두 쳐내야 했어. 그 날은 인류학박물관에 가기로 했었어. 같은 호스텔의 중국인 친구와 일정이 맞아서 동행을 했어. 도시 구석구석을 갈 수 있는 350원짜리 전철을 타고, 길거리에서 타코를 사 먹고, 예쁜 성당이 있으면 들어가 보고.
사람들은 두 동양인을 신기하게 쳐다봤어. 아리가또, 니하오, 곤니찌와, 치노, 이런 말들이 들렸어. ‘안녕’이라 해주는 이는 없었지만 괜찮았어. 그런 데 신경 쓸 필요 없을 만큼 그곳의 모든 게 좋았거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인류학 박물관에 가는 길이었어. 일정이 촉박했던 나는 마음이 급해 최단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을 찾느라 바쁘게 눈을 굴리고 있었지. 그런 나를 알아봤는지, 중국 친구가 그러더라고.
조금 돌아가도 괜찮아. 어차피 길은 다 연결되어있거든. 오히려 도시 구석구석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걸?
그때까지 나는 돌아간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거든. 공부, 오락, 운동, 뭐든지 최단시간에 효율적으로만 하려 했었어. 그래서 박물관을 충분히 다 못 돌아볼까 봐 겁이 났지만, 친구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어.
우회로를 택해 박물관에 가던 일요일 오후,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 삐에로 분장을 한 광대가 아이 한 명과 함께 재주를 넘고 있었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냐고? 아니, 그때는 스페인어를 인사말, 바뇨(화장실) 같은 필수 단어밖에 못 할 때였거든. 그래도 그냥 좋았어. 사람들이 춤추는 게 재밌었고, 풍선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에도 웃음이 났어. 렌즈 뚜껑을 열고 초점을 맞추는데 뷰 파인더 안에서 삐에로와 눈이 마주쳤어. 그러자 그는 다짜고짜 나를 무대 중앙으로 끌고 왔어.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졌어. 이름을 물어보기에 “원(Won)”이라 했더니 “후안(Juan)!”이라고 나를 불렀어. 아무래도 좋았어. 그러더니 나를 댄스 배틀에 패널로 초대했어. 살면서 춤이라고는 춰 본 적이 없거든? 고등학교 때 체육 수행평가로 선글라스를 쓰고 초록색 체육복을 입은 모양새로 팝핀댄스를 춘 이후로 말이야.
근데, 이 사람들의 말을 못 알아듣겠고 이들도 내 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니까 자신감이 솟더라. 음악에 맞추어 요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어. 강남스타일의 말춤 같기도 하고, 미국에서 살짝 배운 살사 같기도 하고, 여하튼 말로 형언 못 하는 그런 해괴한 춤을 추었지. 사람들은 내 춤을 보고 웃었어. 소리 지르고, 같이 리듬을 탔어.
배틀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어린 광대에게서 예쁜 칼자루 모양의 풍선을 선물 받았어. 그 풍선을 갖고 인류학 박물관에 갔어. 어땠냐고? 박물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졌어. 나는 그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거든. 박물관을 좋아하는 어린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 날 실감했는지도 모르겠어. 라틴아메리카와 사랑에 빠졌구나. 언젠가 이곳에 또 오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