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중남미 영화제 - 바다로의 여행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제3회 중남미 영화제를 하고 있다. 오늘은 ‘바다로의 여행’이라는 우루과이 영화를 봤다. 팸플릿에 적힌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주민들이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 보니 여행은커녕 마을 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게 현실. 하루는 바다를 사랑하는 로드리게스의 제안으로 다섯 사람이 로드리게스의 고물 트럭을 타고 난생처음 바다를 보러 떠나기로 한다. 여행 당일, 우연히 약속 장소인 작은 술집을 찾은 낯선 외지인도 여행에 합류하게 된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바다를 향해 출발하지만, 고물 트럭이 자꾸 말썽이다. 게다가 울퉁불퉁하고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길까지. 무엇 하나 순조로운 게 없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도착한 바다. 하지만 로드리게스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과연 여섯 친구들의 바다 여행은 무사히 막을 내릴 수 있을까?
78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 내내 극에 긴장감을 주는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위에 적힌 줄거리가 영화 내용의 전부이다. 도시에서 낯선 시골로 여행을 온 주인공은 우연히 들른 바에서 만난 촌사람들의 대화에서 흥미를 느낀다. 촌사람들을 태운 로드리게스의 트럭이 막 출발하려 할 때, 주인공은 술 한 병을 사서 냉큼 합승을 한다. 촌사람들이 술병을 받으며 이유를 물었다.
“왜 우리랑 같이 가려고 하시오?”
“당신들이 바다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서요.”
알고 보니 이 주인공은 작가였고 ‘바다로의 여행’이라는 단편 소설을 구상할 거라고 했다. 줄거리에 로드리게스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고 쓰여있는데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련은 없다. 촌사람들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던 로드리게스는 해변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바다로 뛰어가자고 모두를 재촉하지만, 이들에게는 배고픔이 먼저였다.
“이보게 로드리게스. 장담하건대 바다가 아무리 아름다운 들 배가 고픈 상태면 아무 감흥 없을걸?”
“젠장. 누가 바비큐를 먹자고 제안한 거야?”
“자네 아닌가.”
한바탕 바비큐 파티를 마치고 촌사람들은 나무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물론 도시에서 온 외지인도 함께. 로드리게스는 단잠에 빠진 이들을 깨우고 드디어 바다에 입성했다. 촌사람 넷에게 “바다를 처음 본 감흥이 어떤가?”를 물었다.
“정말 커요. 물이 이렇게 많다니, 말이 안 되어요”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배가 없어서 좀 아쉽네요.”
“우리 집 침대가 최고지.”
적어도 눈물은 흘릴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던 로드리게스는 이내 체념하고 웃통을 훌러덩 벗어 바다로 입수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해변의 놀이를 즐기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는데 우연히 누군가의 통화소리를 들었다.
“중남미 영화제에 왔는데. 영화가 별 내용이 없어. 그냥 여러 명이서 바다로 가는 길에 일어나는 시덥잖은 내용들이 전부야. 너무 지루했어.”
그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중남미는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았다. 남미 도시의 분위기, 트럭이 종일 달리던 시골길 풍경, 바닷가의 모습은 나의 남미 배낭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에 우루과이를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영화 속 장소들은 마치 엊그제 본 익숙한 동네 같았다. 스펙타클한 사건은 없었지만 촌사람 한명한명에 감정이 이입되어 그들의 농담 하나, 노래 하나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봤다. 영화 내내 흐르며 엔딩 크레딧까지 이어진 잔잔한 음악도 긴 여운을 남겼다.
내가 수도로 여행을 다녀왔잖수. 여행은 돌아보는데 더 큰 재미가 있더이다. 친구에게 그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다 보니 깨달았지요. 아, 그때 그 여행이 참 좋았구나."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여행을 회상할 때 짓는 흐뭇한 미소만큼이나 나도 남미가 참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