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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대가리 Dec 29. 2020

구름 사이, 잠시 비추인 봄볕

영화 <해피 투게더>, 1997

영화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다. 모두가 부러워할 꿈을 꾸고, 기어이 해내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를 생각했을 때 바람처럼 자유롭고 남들과 다른 길을 멋지게 개척해나가는, 말하자면 영화 <세 얼간이>의 ‘란쵸’를 떠올렸으면 했다.

두 번째로 남미에 갔을 때, 그 생각이 얼마나 허무한 지 깨달았다.

“취업을 포기하고 꿈을 찾아 다시 남미로 떠난 멋진 친구”

이상 속의 나는 절대 외로워서도, 현실에 굴복해서도 안 됐다. 남미에 다시 가는 게 오랜 꿈이었으니 매 순간 즐거워야만 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타지 생활에 내면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쉽게 하소연을 못 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인정하는 순간 그 이상은 와장창 깨져버릴 테니까.


인턴 막바지에 2주간의 휴가를 얻어 아르헨티나에 다녀왔다. 그때는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남미 다른 나라를 가도 그곳이 그곳 같겠지 싶었다. 아르헨티나라고 얼마나 다를까. 이과수 폭포에 가겠다는 계획 말고는 어떤 일정도 세우지 않았다.


Iguazu, Brazil, 2018

영화 ‘해피 투게더(1997)’에서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는 연인이다. 홍콩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다. 함께 이과수 폭포로 여행을 가려했으나 길을 잃는다.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 그곳에서 둘의 관계도 길을 잃는다.

늘 방황하고 자유롭게 떠돌고 싶어 하는 보영, 그런 보영이 밉지만 사랑하기에 곁에 오래도록 묶어두고 싶어 보영의 여권을 감추는 아휘. 두 사람의 연애는 지독히 현실적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청춘, 거기에 아무 배경도 없는 타지에서 하루를 일구어가는 이들의 스토리가 아름답기만 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방황이 부러워진다. 장국영과 양조위는 모두들 지나왔거나 지나고 있는 시절을 날 것 그대로 표출한다. 세련되지 못해 후회로만 가득 찬 그때를 떠오르게 만든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토록 시린 곳이었는가, 이과수 폭포가 그토록 외로운 곳이었던가! 이 영화를 먼저 보고 아르헨티나에 갔다면 조금 달랐을까.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인 봄볕이다. 그래서일까, 보영과 아휘는 시종일관 어둡다. 사랑이 정점을 찍는 탱고 씬도 고작 2분이다.

어떤 영화는 삶의 멋진 단면들을 보여주는 반면 어떤 영화는 시리도록 현실적이다. 인생의 축소판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멋진 단면을 전시하는 영화에서 대리 만족 이상의 매력을 느끼긴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하이라이트 사이로 감추어진 지극히 보편적인, 때론 찌질해서 어디 보여주기도 민망한 이야기를 발견해내는 영화가 좋아진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인생이 영화 같기를 바라지 않는다. 잠시 비추는 봄볕을 기다리기 위해 먹구름의 시간을 오래도록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곧 서른이 된다. 20대와 다를 것 없이 방황하며 살 듯하다. 아직 방황할 거리가 남아 있음에 감사하며 꿈꿔본다. 보영과 아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이과수를 다시 보는 날이 오기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홀로 남겨진 보영 (장국영)
엔딩 장면의 아휘 (양조위)
영화 속 부에노스아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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