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자주 드리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 연약함 그대로 사랑하시네”
스스로를 갈아 넣고, 부족한 결과에 무능력을 탓하며 자책하기 쉬운 세상, 아무 조건 없이 나를 그대로 사랑해 주는 분이 있다니! 이 찬양은 큰 위로가 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우리가 말하는 그 ‘내 모습’이란 게 뭘까 의구심이 든다. 이런저런 죄를 짓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꼬박 출석하고 몇몇 사역도 하는 ‘내 모습’인가. 도덕적으로 찔리는 행동은 하지만 술 담배는 하지 않는 ‘내 모습’인가. 동성애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정상”적인 ‘내 모습’인가.
연약함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연약한 부분은 다르다. 죄 또한 상대적이다. 칼로 무 자르듯 “동성애는 죄고 이성애는 죄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남의 티를 지적하기 전에 “네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라”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보수 기독교는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 하는 해묵은 논쟁을 공론장에 끌고 온다.(트랜스젠더나 무성애자 등은 너무 “이상해서” 상상력 범위 밖이며 그들에게 논의 대상조차 아니다.) 구약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죄’로, 동성애자를 ‘구원(=치료)이 필요한 대상’으로 규정한다.
기독교에서 흔히 쓰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은 보통 본인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고백이 진실이라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기에 동시에 의로울 수 있음을 믿고 의로워지기 위해 평생을 힘쓴다.
따라서 성적 지향이라는 개인적인 영역을 두고 죄다 아니다 판단할 권리는 그 어느 인간에게도 없다. “죄인입니다”는 간증은 스스로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하지, 누군가에 의해 강제될 수 없다.
성경 이야기 중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가장 좋아한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혐오했다. 윤리의식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물 한 번 기르기 위해 햇볕이 따갑고 그늘도 없는 낮에, 근동의 거리를 걸었다. 혐오의 시선이 무서웠을게다.
그런 그녀를 예수님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그러고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여기 있다며 자신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담을 허물었다. 세상과 그녀를 막는 담이었다. 그에게 남편이 다섯 있었다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서두에 말한 그 찬양은 후렴에서 가장 큰 소망이자 가장 큰 은혜가 주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그 은혜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누렸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런 세상을 꿈꾼다. 당신이 얼마나 연약하든, 남들이 보기에 그 모습이 얼마나 추하든, 모든 것 보듬어 안으시는 따스함을 알게 됐으면 좋겠다.
혐오와 무지로 얼룩진 지금의 교회는 외려 그 따스함을 차갑게 만드는 건 아닌지. 예수님이 무너뜨린 담을 예수를 믿는다는 핑계로 다시 견고하게 세우고 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