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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09. 2023

선량함의 근육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아나 앙케르와 마리 크뢰이어가 있는 스카겐 남쪽 해안의 여름 저녁>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가 그린 '스카겐 남쪽 해안의 여름 저녁'에 등장하는 두 여자는 역시 화가인 페더의 아내 마리와  아나 앙케르. 왼쪽의 작은 여자가 아나, 오른쪽의 키가 큰 여자가 마리입니다. 둘 다 재능을 빛내던 어린 여성 화가였고, 당시 거장이었던 남자 화가들과 결혼했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자못 달랐습니다. 여성 화가였던 마리 트리프케는 당시 덴마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마리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 갑니다. 아내의 헌신 뿐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까지 자양분 삼아 크게 성공하고야 만 페더 때문에 소진하고야 만 마리는 나중에는 남편을 떠나 스웨덴으로 도망쳤습니다. 남편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살기 위해, 자기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당시는 아직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나중에는 20세기 덴마크의 국민 화가로 승격한 아나 앙케르마저도 결혼 직후에는 그림을 그만두고 남편을 봉양하라는 압박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 마이클 앙케르는 부부 작업실을 만들어 아내의 화업을 지원했습니다.) 두 여성화가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고난과 즐거움, 그리고 희망과 고통을 모두 이야기했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맞잡은 손과 손목이 선의였으리라, 어진 손과 어진 손이 맞닿았으리라는 것만큼은 진실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시오미 에이지라는 남자. 장미를 들이지 않는 작은 꽃집을 운영하면서 총명한 딸 하나를 귀하게 키우는 미혼부. 아이 역시 발랄하고 사려 깊게 키우고 주변의 외로운 이웃들을 섬긴다. 시간과 돈을 넘어 심지어, 차마 생각하지 못할 도움까지 주어가며 주변을 살리는 사람.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행동과 품성으로 인해 충만함을 느낀다. 


 《장미가 없는 꽃집》 (薔薇のない花屋)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이야기다. 나에게 있어 선량함의 인식은 이 작품을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 누군가는 ‘호구’로 볼 수도 있을만큼 선하디 선한 사람. 그런 그는 어떻게 그토록 선량할까? 누구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과거와 정체는… 현재의 그를 믿을 수 없도록 감사하게 한다.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 않아 입을 꾹꾹 닫는 게 아쉽지만. 뭉뚱그려 조금만 조금만 밝히자면 에이지는 참 아픈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자기가 이토록 상처받았으니 타인에게도 상처부터 주고 시작하는 악마 같은 사람이 되어도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을 만한 과거를. 같은 환경에서 그의 친구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고,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그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는 한결같이 선량한 사람이 되었다.  


강하고 아름다운 선량함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을 가뿐히 통제할 수 있다. 악함이 승한 사람이 그를 ‘호구’라 일컬으며 자극할지라도 넘어가 주지 않는다. 악인이 거 보라며 괴롭히더라도 튼튼한 인격으로 맞선다. 인격의 근육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강인하다. 무엇보다 선량함이 아름다운 이유는 끝없는 선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근육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격의 근육을 기르는 데는 끊없는 선택이 필요하다. 어느 개가 이길 것인가, 어느 개에게 먹이를 줄 것인가 하는 검은 개와 흰 개의 우화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성선설을 인정하기 불편하고 성악설이 우리에게 신뢰로운 이유는 인간 본능의 거짓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악함을 우리는 이미 능히 알고 있는 거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선함은 악을 제어하는 데서 나옴이 자연스럽다. 분명 선량함은 절제력에서 나온다. 좀더 과장하자면 자기 본성의 악마과 싸워 이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 악을 제압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선량함이다. 


악한 마음은 잘 포장해서 감출 수도 있지만, 선한 마음은 너무 크고 거대해서 전혀 감출 수가 없다.슬픈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심장을 내어 주고 싶지만 선한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싶은 게 선량한 사람이니… 선량한 사람은 선량한 사람에게 끌린다. 내가 진실로 선량한 사람일 때 내 곁에 선량한 사람이 다가온다. 인생 끼리끼리 콩콩팥팥의 원리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선량함은 착하고 어질다는 뜻이다. 많은 착한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선함이 없음을 고통스러워한다. 어떤 착함 앞에서는 자신이 거짓된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어떤 어질음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남루해진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감히 잘난 듯 나서지 못한다. 세상 천지 갑질이 만연한 곳에서 을의 역할을 보통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본인이 을임을 자처한다. 대개 선량함을 가진 사람들이다. 어쩌면 호구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와서 부비고 위로해달라고 하고, 도와달라고 읍소하고, 큰 소리를 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착함을 바보 취급한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듯 비웃으며 그들을 조금씩 이용한다. 그러나 착하고 어질은 이들이 정말 그들의 잔머리를 모를까? 선택에 선택을 지속하면서 마음의 그릇을 넓혀온 이들이? 


사람이 타인에게 죄를 지으면 기분만 불편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인격에 상처를 입는다.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양쪽으로 상처를 주는 것. 상처를 주면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곧 양심의 원리다. 상대가 파악하지 못할 만큼 작고 은밀하더라도 똑같다. 선량한 사람은 알게 모르게 그 칼날을 파악한다.  


관계의 갑이 되고 싶다는 호기 어린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관계의 갑(甲)과 을(乙)은 관계가 끝나는 순간에야 알 수 있는 거란다.’ 살면서 선량한 사람 하나만 알고 지내도 삶은 기적 같으리라. 그런데 그를 잃으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 선량함 자체가 힘이고 매력이다. 거대하다. 숭고하다. 기품의 원천이다. 


선량한 사람을 곁에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은 사람에게 물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모델을 만나 그 삶을 경험했을 때,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나 역시 그러히 닮아갈 수 있다. 나 역시 그러한 선량한 이가 되고 싶지만 아직 멀고먼 길이라, 내 곁의 선량함을 기록하고 또 기록해둔다.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가스등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윤동주(1917~1945) <간판 없는 거리>, 1941


어질은 이는 홀로 어질지 않다. 어질음은 관계성을 통해 성립되는 인품이오니, 어질음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오니, 손목을 잡아 서로를 어질게 하고서야 완성된다. 따뜻한 기세로 이로움을 끝맺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만남이 있다,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마주침 말이다.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매년 300~400명의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어떤 이름은 잊혀져서 아쉬우나 어떤 이름은 흐려지지도 않고고 각인된다. 가슴에 맺힌 이름들 몇몇 중의 고운 이름, 나는 '어진'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앞으로 이 아이가, 부유한, 튼튼한, 총명한 아이가 되기보다 '어질은' 아이가 되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감동적이어서다. 그 부모들은 분명, 어짊을 선함을 얻기 위해 아이가 수없이 싸우고 다치고 눈물을 흘리는 선택을 해야 함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돼지 목에 진주를 건 듯 젠제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본다. 아름다운 척 깍듯한 척 세련된 척 하지만 완벽하게 세팅했지만 정작 선량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그런 이에게 숙녀의 이름은 겉돌기만 한다. 품위의 어떤 핵심은 분명 선량함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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