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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Feb 08. 2024

2024년 그 시작에 대하여

팔목과 정강이 부상을 당했다

2023년의 시작은 굉장히 낯설었는데 24년은 낯설지 않다. 습관적으로 202 뒤에 3을 썼다 지우는 일 한번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짝수를 좋아했는데 그게 이유일까? 25년은 조금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벌써 든다.


숙제 같은 일들은 널려있었지만 조금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새해에 크게 다치고 말았다. 스키를 타다가 같은 쪽 팔과 다리를 동시에 다친 일인데, 그 정도가 심각해 양쪽 다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당장 수술을 해줄 수 있는 곳을 찾아 병원 몇 곳을 돌았다. 난생 처음 실려본 들것, 난생 처음 누워본 수술대였다.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위에 누워 드라마에서나 보던 천장뷰를 봤다. 화면에서 본 너무 그대로라 오히려 실감이 안 났다. 수술실은 너무 추워 몸이 벌벌 떨렸다. 그건 드라마에 없던 얘기였다. 종이 옷 하나 걸친 나를 사람들이 조금 거칠다시피하게 다뤘다. 내가 너무 무방비상태여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이를 덜덜 떨며 눈을 감았다. 난생 처음 달아본 링거줄을 통해 차가운 액체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무서웠다.


나는 내가 괜찮을 줄 알았다. 수술이라는 게, 마취 풀리면 아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 고통의 정도는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이 불가능 한데다가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이미 그가 한참 괜찮아졌을 때 듣게 되는 것이 태반이라. 이렇게 아플 줄은 전혀 몰랐다. 막상 수술 직후는 마취기가 남아 편했다. 움직일 수 없고 팔이나 다리가 내 맘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반으로 접혀 올라가는 침대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래도 오른쪽 손과 오른 다리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본래 신체에 없던 물체를 몸 안에 집어넣었을 때의 반작용은 확실했다. 마취 기운이 사라지자마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다리와 무릎, 발목이 전부 아파왔다. 다친 곳은 정강이었지만 철심은 발목과 무릎으로 들어갔고, 수술을 한 모든 부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팠다.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은 오늘과 내일 밤이 가장 힘들 거라고 했다.


밤이 되니 고통이 더 심해졌다. 무통주사가 있으나 소용이 없었다. 진통제도 소용이 없었다. 주사를 그렇게도 싫어하는 내가 아프니까 계속 놔달라고 했다. 엉덩이에 맞는 주사인데 그 아픔이 하나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병실 반대 쪽을 쓰던 할머니가 내 신음소리에 몇 번이고 짜증을 냈다.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나인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잠에 들고 싶었지만 잠이라는 것이 도저히 찾아올 수 없는 아픔이었다. 시계를 보면 시간이 가는 게 너무 더뎠다. 새벽에도 몇 번이나 호출벨을 눌렀다. 다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인데, 쉬게 해야 하는데, 내가 울어도 아픔은 달라지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애걸복걸 하게 됐다. 너무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이런 수술을 다음날 하나 더 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마취 속에 받는 수술 자체는 그 공포감만 제외하면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팔목 수술을 전날과 같이 금방 끝이 났고 정강이 수술 직후 끔찍한 고통을 미리 겪은 터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다만 힘들었던 건 아무리 예고했다 하더라도 24시간 내내 위 아래로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마치 팔 다리 아래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목청이 터져라 아주 높은 주파수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리를 올리고 있으라고 하는데 그러고 있다보면 아팠다. 한 자세로 오래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딱딱한 병원 침대 탓에 계속 누워있는 쪽 엉덩이 가운데 멍이 든 것 같았다. 누워 있기가 힘들었다. 팔 다리는 망가졌는데 누워 있을 수도 없다니 이걸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아픈 부분을 피해 조금씩 몸을 돌려가며 버텼다. 어떤 자세도 편하지 않았다. 그날 밤은 지옥이었다.


나는 한번도 아픈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뻔한 말이지만 그 사실을 아파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아픔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함부로 상상하기 어렵다. 내가 겪은 아픔이 지금 내 인생에서는 120%의 고통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80% 정도의 아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내 인생 120%의 고통을 맛본 이후에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절대 판단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수술 뒤 며칠 밤은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단 몇 분도 쉽게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효과가 없는 무통주사지만 그마저도 넣어보겠다며 계속 누르다가 통이 아래에 있는 바람에 피가 역류했다. 자꾸 움직이는 바람에 손목에 박힌 링거 바늘이 빠졌는지 무통 주사가 들어갈 때마다 따끔거리고 쓰렸다. 두번째인가 세번째 날 밤에는 너무 힘들어 시간이 개미 기어가는 속도로 가는 기분이었다. 울면서 진통제를 놔달라고 했다. 4시간에 한번 놔줄수밖에 없다고 간호사 분들이 난처해했다. 진통 주사를 맞아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몇 주 뒤면 끝날 고통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통증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하면 정말 그 때는 편해지고 싶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스스로 하고 스스로 놀라서 지웠다. 내가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잠에 들지 못하자 센 진통제를 주셨다. 링거줄로 들어오는 차가운 느낌과 함께 울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날 가까스로 잠에 들 수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후로는 조금씩 병원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아픈 엉덩이에는 쿠션을 댔고, 며칠에 한번 수술부위 소독을 해주러 오시는 분과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다리를 조금씩 드는 연습을 하는 게 좋아요”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다리를 들어올릴 때마다 조금 무력감이 들었다. 잘 들리지도 않았다. 팔은 그나마 빨리 통증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거동이 불편하니 소변줄도 달았다. 한 다리로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재앙이라고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나의 몸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스스로 화장실에 가고, 머리를 감고, 밥을 먹고 하는 행동들이 어렵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아직 몸은 다 낫지 않았지만 이제 이렇게 타자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손가락은 움직이고, (비록 깁스 때문에 왼쪽으로 치우쳐 올린 팔이 저려 몇분에 한번씩 쉬어야 하지만) 혼자 외출은 어렵지만 한 발로 집에서 의자를 짚고 화장실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처음 집에 왔을 때는 화장실에 가다 미끄러져 땅에 누워 그저 울었었는데, 지금 아무렇지 않게 “하나 둘 셋” 하고 툭 문턱을 넘어 다니는 걸 보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는가 보다.


깁스해체부터 재활까지 아직 가야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았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다. 아마 가장 힘든 시간이 지나갔다는 마음 때문일까. 그때, 정말 세상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그 밤들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보내고 있는 밤은 길지만 참 편안하게만 느껴진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도 다 지나간다는 것, 그 순간을 이렇게 되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느려도 결국 치유된다는 믿음. 요즘은 주변 사람들이 몸에 좋은 것들을 많이 보내줘, 예전보다 더 튼튼해질 것 같다는 농까지 한다.


2024년이 그리고 그 이후가 내게 어떤 길을 열어줄 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 길 위에는 아주 큰 돌덩이도, 또 그것들이 귀신같이 굴러 사라져버리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믿음이 있으면 나는 괜찮다. 운 없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이 때문에 팔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견뎌야 하는 것처럼 이 악물고 참고 견뎌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 그래도 내 사람들의 사랑을 진통제 삼아, 이 아픔이 사라질 것이란 믿음을 철심 삼아 나는 결국 버텨낼 것이다. 없었으면 좋았을 사고였지만 이로 인해 배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사 세옹지마, 좋은 일이 생길 때보단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많이 되뇌는 말이지만 무통주사 삼아 눌러본다.


다시 웃는 일이 생기겠지. 버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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