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의서점 Dec 17. 2017

오직 기록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 밤의서점 10년 다이어리 단상-

 스물 즈음에는 내가 마흔이 된다는 것을 꿈에도 떠올리지 못했다. 떠올리지 못했다기보다는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때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모님은 열아홉까지는 부모가 보호하지만 스물부터는 알아서 맘대로 살아라 라고 하셨다. 물론 책임도 네가 지고 라는 단서를 붙이셨고. 

  대학에 오니 마냥 신났다. 당시에는 자정에 술집이 문을 닫아야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무슨 해괴한 일이냐고 묻겠지만 암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주당들은 자정 이후 셔터를 내리고 영업을 하는 몇 군데 은밀한 술집에서 술을 새벽 두 시까지 마셨는데 이것도 스물 이후의 자유에 해당했다. 우리의 생각은 아주 심플했다. 우리는 자정에 결코 끝내지 못한 중요한 이야기(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중요한 이야기였다.)가 있는데 술집은 자정에 문을 닫으므로 당연히 그 시간에 문을 여는 업소를 찾는 것이다. 그 어느 날인가도 신촌의 모 업소에 갔는데 그날은 그곳의 문이 닫혀 있었다. 혈기 왕성한 스물 한두 살, 많아도 스물다섯 살이었던 우리는 그 집의 열쇠를 따고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피아노를 치면서 실컷 놀았다. 다음날부터 경찰이 우리를 잡으러 올까 노심초사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걱정 자체가 순진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 바도 불법영업을 하는 곳이었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간이 쪼그라들어 안주도 없이 싼 맥주만 마시고 취한 정신에도 유리잔도 깨끗이 씻고 나왔다. 그곳에는 평소에는 학생 처지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양주가 가득했는데도 말이다. 

 졸업 후 보험회사에 취직한 친구가 생명보험을 들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당연히 들어주었지만 그 친구가 얼마 후 회사를 나왔을 때 바로 보험계약을 철회했다. 이십 대의 내게 죽음이란 정말 먼 일이었고, 아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고, 어쩌면 지금 죽어도 뭐 그리 아쉽지 않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일 당장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는 사람에게 무슨 생명보험이람 했던 것이다. 

 

00 씨 말이 맞아.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회사 생활을 하고 오래 살 거예요. 통계적으로 말이지

 첫 회사 사수인 ‘늠름한 유대리님’이 내게 이런 말을 했을 때 깨달았다. 내가 30대는 물론 40대도 50대도 60대도 심지어 80대까지 살 가능성이 더 높겠구나 하는 어찌보면 당연한, 그러나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깨달음이 들었던 것이다. 통계적으로 말이다. (늠름한 유대리님은 참으로 대범하고 좋은 여자 상사인데 남자 상사들 앞에서나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당시 별명이 ‘늠름한’ 유대리님이었다. 나는 사려깊은 유대리님이 좋고 지금도 이 분이 너무 좋다.) 

 당시, 퇴근 후 홍대의 사우나 같았던 지하 공연장에서 인디밴드들의 공연을 보며 방방 뛰어다니던 내가 아 나에게도 중년과 노년의 시절이 있겠구나 깨달은 최초의 순간이다. 지금의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의 죽음이 단순한 나만의 죽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건강검진도 열심히 하고 보험도 꼼꼼히 드는 중년이 되었다. 

 나이가 느껴지는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황사 때 차고 나간 마스크 자국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때, 탄산음료를 먹을 때 이가 시릴 때, 혹은 머리를 감을 때 샤워기로 헹구다 아이고아이고 허리야 할 때, 내가 늙어가는구나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은 사실 이럴 때 든다. 네이버 뉴스에서 기사를 읽을 때, 누가 봐도 배덕한 일이라고 판단되는 불륜이나 사기나 폭행이나 기타 사건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잠시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할 말을 잃을 때이다. 저 사람은 어쩌다 저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하며 기사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복잡한 삶을 떠올릴 때다.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의 혼란이 가시고 무엇이든 명확해질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더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밤의 점장이 10년 다이어리를 만들자고 했을 때, 좋은 기획이지만 나는 쓰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10년이란 세월을 기록한다는 것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10년을 더 살 가능성이 많고(통계적으로!) 시간 속에 흘려보내는 생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것이 아무리 반짝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오직 기록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니 갈수록 우리를 헤매게 하는 무자비한 시간의 침입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만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의 십 년의 기록을 계속 담아 소중한 누군가에게 남겨주고자 한다. 앞으로 운이 나쁘지 않으면 3권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통계적으로 말이다.) 

- by 폭풍의 점장

 

* 밤의서점 10년 다이어리가 나왔습니다. 하루에 한 줄 나의 소소한 역사를 남겨보기를 권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벌써 1년, 밤의서점 분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