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현수: (당황한 듯 꽃분을 보며) 이모...
꽃뿐 이모: 현수야, 내가 저승에 올라간 사이에 말이지~
염라대왕이 실무 보는 저승 사자한테는 기보 사서가 뭔지 말하셨데.
현수, 니가 맡은 기보 사서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말이양~
그러니 그냥 받아들이렴~
내가 음식하느라 좀 늦어서~
우리 저승 사서보다 저승사자들한테 현수가 먼저 대접을 받네~
현수: (저승사자를 일으켜 세우며) 이, 일어나세요. 사자님들.
저승사자 모두: 예, 기보 사서님.
현수가 나서서 저승사자 4명을 일으켜 세운다.
아무리 봐도 현수는 저승사자들의 허옇게 질린 얼굴과 까만 입술은 적응이 안 되었다.
하지만 현수는 내색하지 않았다.
저승사자는 엉거주춤 일어나면서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꽃분 이모의 눈치를 살폈다.
꽃뿐 이모: 일어나게들~
현수가 그러라 하잖아용~
저승사자 모두: 예, 꽃분 이모님.
꽃뿐 이모: 현수야, 그런데 너 큰절 받을 만해~
너가 기보 사서를 하면 말이징~
저승사자가 할 일이 절반 이상으로 준단다~
현수: 네? 그치만.
그래도 이런 큰 절은, 어쨌든 좀 과해요. 이모.
사자 2호: (90도로 인사하며) 기보 사서님.
원래 모든 저승 사서님은 저희에게 선배님이세요.
사자 3호: 기보 사서님도 저승 사서라서 저희가 존대하는 건 당연합니다!
사실은 망자 버스는 저승사자 업무 중에서도 가장 일이 쉬운 편이에요.
사자 1호: 그래서 저처럼 인턴에서 갓 사자가 된 저승사자들이 탑니다.
현수: (놀라며) 네?
얼마 전까지 인턴이셨다고요?
현수가 왜 이렇게 놀랄까?
사실 저승사자 1의 외모는 아무리 젊게 봐도 60대 같았기 때문이다. 사자 4명의 나이는 다 달라 보였는데 그래도 현수보다 어린 외모는 없었다.
그러니 현수가 놀랄 수밖에!
그런 현수의 표정이 재밌는지 꽃분 이모와 저승사자의 얼굴에 큰 웃음이 번졌다.
사자 2호: 사서님.
산 사람들과 달리 저승사자는 입사순으로 나이가 많은 모습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망자들이 초짜라고 무시하지 않거든요.
사자 3호: 산 사람 기준과는 좀 다르죠?
아무래도 산 사람들은 나이 든 분에겐 알게 모르게 더 예의 바르니까요.
사자 1호: 인턴급의 저승사자를 배려한 모습이에요.
승진할 때마다 점점 더 젊어지고요.
2인 1조로 망자들을 담당할 직급이 되면 자신이 원하는 나이의 모습으로 업무를 봅니다.
현수: 와!
정말 이승 맞춤으로 잘 설계한 방식이네요.
사자 4호: 기보 사서님, 아까 잠시 뵈었죠?
제가 몰라뵙고...
염 사서님께 기보 사서님 계신 곳만 알려드리고 인사를 못 했네요.
현수: (기억이 난 듯) 아! 안녕하세요.
아까 제가 누워있던 곳 알려주신 사자님이시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계속 들어도, 사서님은 좀 아직 어색하네요.
사자 4호: 어휴~ 이제 슬슬 적응하셔야죠.
진짜 엄청난 기보 사서님인데요~
마치 팬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저승사자 사이에 서 있는 현수를 보자 꽃분 이모는 뭔가 떠 오른 듯 말을 꺼냈다.
꽃분 이모: 사자님들~ 아직 내가 일 설명을 못했어.
기보 사서가 뭐 하는 건지~
저승사자 모두: (무척 놀라며) 네? 이모님!
그게 이번 만월에 제일 중요한 건데요?
꽃뿐 이모: 응. 중요하긴 한데~ 만월의 밤은 길고~
급하게 설명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알죠?
또 우리 사자님들 식사 챙기는 것도 중요하니깐~
밥은 먹고들 해야지?
저승사자 모두: (감동한 눈빛으로) 네!
이모님!
#2
너스레를 떠는 저승사자들의 말이 싫지 않은 듯 꽃분 이모는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현수가 매점에서 늘 보던 꽃분 이모의 그 얼굴이었다.
저승사자 중 한 명이 꽃분 이모의 오늘의 도시락을 슬쩍 열어 보았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았다. 그중에 한 명이 노리개에 달린 복주머니에서 팥알을 하나 꺼내어 던졌다.
그랬더니 마치 발리에 있는 레스토랑처럼 밀짚으로 된 파라솔, 원목 식탁과 의자, 하늘색과 흰색의 줄무늬 테이블 매트, 나무로 된 식기류가 세팅되었다.
그리고 손가락 스냅을 한번 ‘탁’하고 주니, 멋진 무드등이 테이블을 밝혔다.
저승사자 모두: (90도로 인사하며) 잘 먹겠습니다.
꽃분 이모님.
꽃분 이모: 응~ 그래.
언제 봐도 메뉴랑 테이블 세팅이 맞추는 센스가 멋지네들.
현수:(어안이 벙벙해하며) 이모...?
꽃분 이모: 아~
오늘 메뉴가 태국식이야. 그래서 그래.
현수: 네...?
#3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현수와 꽃분 이모는 도서관 앞쪽 정자로 향했다.
꽃분 이모와 현수는 정자 아래에 마주 보고 앉았다.
현수는 자기가 아는 저승사자의 이미지가 다 깨져버려서 멍했다.
한복을 입은 저승사자라고는 오래된 TV 프로인 ‘전설의 고향’의 저승사자가 다였다.
실제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저승사자는 철저한 고증에 의한 모습이었다.
까만 한복, 하얗게 질린 얼굴, 검은 눈과 입 주변...
오늘 본 저승사자들의 모습과 똑같다.
그런 이들이 밥을 먹기 위해 발리 해변풍의 테이블 세팅에 태국 음식을 먹는다니...
너무 현대적이다!
현수가 아는 현대적인 저승사자의 모습은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현대복 차림이다.
음.
그 모습은 저승사자라기보다는 이승에 있는 저승 사서의 모습에 가까웠다.
하지만 저승 사서님은 저승사자 업무를 보지 않으니...
꽃분 이모 저승사자가 저러는 게 망자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들이 저승으로 안내하는 망자들은 현수랑 같은 세대를 사는 현대인이라 공감대 형성과 소통을 위해서라고 한다.
꽃분 이모: 그나저나 현수야~ 환등기 아니? 혹시 보이닝?
현수: 네? 환등기이요?
혹시 그 카메라 필름을 한 장씩 잘라서 슬라이드 마운트에 넣어서 인화된 것처럼 비춰서 보는 거 말하는 거에요? 동그랗게 돌아가는 팬 모양으로 된 그 환등기요?
뭔지는 아는데... 창고에 있을걸요?
꽃분 이모: 어머 너 어떻... 아! 아버지가 사진을 쓰셨다고 했지.
뭔지는 아는데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저승 신분패가 귀신과 기억을 모두 제어해 주는구나.
현수: 네!
그러려고 받은 거니까요.
이모도 아시잖아요?
꽃분 이모: 어어, 그렇긴 한데.
그럼, 현수야!
너 저승사자들도 얼굴도 아직 악귀처럼 보이니?
현수: 네...
꽃분 이모: 어머!
이모가 몰랐다. 얘!
우리 현수가 속이 깊네~ 놀란 티도 않고.
현수: 뭘요.
꽃분 이모 처음 봤을 때 제가 큰 실수하고 배운거죠.
꽃분 이모: 그러게~
(웃으며) 나한테 쌍꺼풀 수술했냐고 했었지?
그게 벌써 언제쩍이니~
현수가 꽃분 이모를 처음 만나고 기절한 날.
꽃분 이모가 자랑스럽게 말했던 저승 사서들만이 쓸 수 있는 새까만 선글라스가 기억났다.
이 선글라스를 쓰면 저승 사서는 이승의 산 사람 모습을 하고 현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물론 산 사람들에게는 선글라스가 보이지 않는다.
저승사자는 투명 인간처럼 아예 보이지도 않고, 산사람이 망자가 되기 직전에나 보인다.
망자처럼 산 사람에게 저승사자는 서늘한 기운으로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현수는 저승사자도 저승 사서도 본다.
그래서 꽃분 이모는 자신들처럼 현수가 망자의 머리 위에 뜨는 ‘기억의 환등기’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꽃분 이모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현수가 저승 사서인 자신과 저승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망자들의 환등기도 보인다고 생각했다.
현수에게 망자의 상태가 어떤지 환등기로 보이지 않는다는 건?
현수는 산 사람과 망자, 그사이 경계에서도 산 사람에 가깝다는 소리였다.
산 사람이 죽은 자인 망자나 귀신을 느끼고 천기를 누설하는 것 그것이 무당의 역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무당들이 자의든 타의든 받은 능력이 바로 ‘신기’였다.
그런데 현수의 몸은 신기를 품을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판산동의 무당촌네 이들도 꽃분 이모도 밝혀내지 못했다.
염라대왕이 현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현수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준 것이 ‘저승의 신분패’였다.
현수의 ‘저승의 신분패’는 저승사자의 노리개와 복주머니나 저승 사서인 꽃분 이모의 선글라스 같은 역할을 했다.
염라대왕이 허한다는 뜻만 가지면 누구나 소유하는 즉시 쓸 수 있었다.
오래도록 쓴 저승의 신분패 때문에 현수가 망자의 기억 환등기를 볼 수 없다면?
현수가 저승사자처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산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 일을 현수는?
현수의 할머니인 홍판덕 여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꽃분 이모는 마른침을 삼켰다.
꽃분 이모: 현수야.
홍 여사님한테 전화 좀 해볼래?
현수: 아! 넵! 이모.
#5
만월의 새벽, 적막한 도서관 정자에서 현수는 할머니인 홍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하는 통화 연결음이 건너편에 앉은 꽃분 이모 귀에 들릴 정도였다.
현수: 시간이 늦어서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실지 모르겠어요.
꽃분 이모: 응, 늦긴 했지.
그래도 원래 만월에는 늦게 주무셨으니깐.
“딸깍”
홍여사: 수야가? 현수야.
만월 잘했나?
현수: 네 할머니.
좀 늦었죠?
홍여사: 어데~ 괘않타.
만월이기도 하고 아까 그 엽서 때문에 혹시나 해서 안 자고 있었다.
현수: 할머니!
그, 그 좋은 소식 때문에 꽃분 이모랑 통화를 좀...
홍여사: (말을 끊으며) 꽃분이? 만다꼬?
니 그 좋은 소식이 만월 도서관 일이가?
현수: (당황하며) 네, 네.
만월 도서관 일이라면 늘 반기는 할머니가 정색하는 목소리로 대하니 현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 꽃분 이모가 앞에 있으니 꽃분 이모의 기분이 어떨지,
현수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꽃분 이모: (괜찮다는 투로) 현수야.
전화기 좀.
현수: 네... 이모
할머니, 이모 바꿔드릴게요.
꽃분 이모: (진중하게) 홍 여사님~
현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분 이모가 통화하기 편하게!
현수의 일이지만,
기보 사서가 된다라는 것이 예삿일은 아닌 듯 해서 할머니도 꽃분 이모도 할 말이 많을 듯했다.
현수는 도서관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꽃분 이모 쪽을 뒤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꽃분 이모는 별일 없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싸인을 보냈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미안하고 안쓰러운지 현수는 또 특유의 쓸쓸한 미소를 내보이고 말았다.
현수는 애먼 땅을 발끝으로 툭툭 파고 있다가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저승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이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현수는 잠깐 움찔했다가 이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정신을 차린 듯 저승사자에게로 향했다.
3호 사자: (반갑게 손짓하며) 기보 사서님.
현수: 예.
1호 사자: 이리로 와서 커피 한잔해요.
2호 사자: 여기 사자님이~
바리스타 저리 가게 커피를 잘 내려요.
4호 사자: 아유~
가제천에 핸드 드립할건데, 괜찮으세요?
3호 사자: 어떻게~
우리 사서님은 아이스? 아님 따듯하게?
현수: 저는...
현수는 대답을 하다 말고
저승사자의 테이블 뒤로 보이는 망자 버스에 눈길이 머물렀다.
늘 이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혹시라도 망자를 마주칠까 두려워서...
비둘기 깃털을 하늘로 불어올 린 후엔 늘 꽃분 이모와 짧은 눈인사만 나누고 돌아섰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본 2층 망자 버스는 은하수처럼 별빛이 고요하게 반짝여서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3호 사자: 버스가 진짜 밤하늘만큼 예쁘죠?
현수: (멍하게 버스를 바라보며) 그러게요.
1호 사자: 기보 사서님, 요 커피는 따듯한 게 제맛인데~
현수: 그래요?
저 한 번도 안 먹어봤어요.
4호 사자: 어이구!
우리 기보 사서님의 첫 가제 커피를 내려드리는 게 저라니!
영광입니다.
현수: 말씀 편하게 하세요.
2호 사자: 자~ 커피잔을~
꽃분 이모님도 통화하시고 오실지 모르니 다해서
1호 사자: 6잔 세팅할까요?
현수: 저도 도울게요.
5명이 한데 어울려 커피를 맛보기 위한 테이블 세팅을 했다.
갑자기!
사자 1호가 몸을 원하는 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1호는 ‘어? 엇!’ 하더니 온몸이 뒤틀린 듯 급격하게 꺾였다.
그러다가!
사자 1호의 눈동자가 빨갛게 변하더니 똑바로 서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현수,
한심한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