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ff the record Dec 11. 2024

18. 현수를 보듬어 주는 꽃분 이모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8. 현수를 보듬어 주는 꽃분 이모  


        

#1     



염사서는 무사히 만월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바로 복귀할 수 없었다. 염라 대왕에게 전갈이 또 와있었다.

꽃분 이모에게 당장 서찰을 전달하란 것이었다.

현수의 기보 사서 발령처럼 또 천장에서 뚝 하고 서찰이 떨어졌다.     

염사서는 서찰을 받아들이고 1층으로 갔으나 바로 전달하지는 못했다. 

꽃분 이모와 현수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분 이모: 현수야~

악보를 기록하는 걸 기보(記譜)한다고도 해.

만월 도서관에는 인근에 학교도 많고 하다 보니 아이부터 어른들을 위한 악보가 정말 많단다.

피아노부터 오카리나까지~

서울 시내 도서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야~

그래서 표면상으로 현수 너는? 

만월 도서관의 악보 관련 도서를 전담하는 ‘기보(記譜) 사서’라는 명칭으로 뽑혔어~     


현수: 기보 사서요?     


꽃분 이모: 산 사람들 서류에는 그렇게 정규직으로 기록될 거야~   


            

현수는 사실 지금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 어느 누구라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라던 행복이 갑자기 다가오면 사람들은 기뻐하면서도 그 행복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이 행복이 계속될까? 

하면서 말이다.          

산 사람인 현수가 저승 사서가 관장으로 있는 만월 도서관에 염라대왕의 공문을 받고 사서가 되었다.



정말 이렇게 국가직인 도서관 사서가 되는 걸까?     

이런 의문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지 않나?

하물며 꽃분 이모는 엽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놀람과 충격.

감정 해소.

충족감.

의심의 발현.  


        

만월의 밤, 그것도 고작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현수가 경험한 감정이었다.     

산 사람은 밤이면 감정적으로 변한다. 

현수는 자신이 지금 상황과 밤에 영향을 받아서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2     



꽃분 이모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꽃분 이모: 정규직 사서니깐 걱정하지 마. 

만월 도서관에서 너는 악보가 아닌 다른 의미의 기보 사서 일을 하게 될 거양. 

기보에는 다른 뜻도 있단다~     


현수: 어떤 뜻인데요?     


꽃분 이모: 기보(祈報)는, 

빌 기(祈)자에 갚을 보(報)자를 쓴단다.

신에게 기원하고 갚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징~

사람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봄이 오면 지내던 제사, 가을에 하는 풍요로운 추수에 감사하던 제사를 뜻해~     


현수: 아!     


꽃분 이모: 너는 삶의 봄을 싹 틔우는 옥황상제와 삶을 거두는 가을 같은 염라대왕.

그 아래 난 이들이 

자신의 삶을 싹 틔우고 추수하고 스스로의 삶을 좀 더 아름답게 기억하며 기릴 수 있도록! 

그들이 공허로 인해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빌려주는 사서가 될 거양~     


현수: 망자에게 기억을 빌려준 적은 없는데... 

어떻게요?     


꽃분 이모: 너 기억은 각색된다는 말 아니?      


현수: 알아요. 

실제 사건과 사람들이 기억하는 게 조금씩 다르죠.     


꽃분 이모: 넌 망자들의 기억을 보고 

공허로 사라진 기억을 채워주기 위해서 기억을 빌려주는 사서가 될 거야. 

너의 기억이나 경험일 때도 있고, 

다른 이의 기억이나 책의 이야기를 빌려서 망자의 공허를 메우는 거지. 

그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삶을 기억할 수 있게... 

기억을 빌려주고 빌어주렴.      


현수: 네.     


꽃분 이모: 그래서 넌, 빌 기(祈)자에 갚을 보(報)자를 쓰는 기보(祈報) 사서야~

물론, 산 사람 사서들이 하는 일도 할 거야. 

너는 산 사람 사서니깐.

망자만큼 공허로 가득 찬 산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기억을 빌려줄 수 있어.     


현수: (울컥) 꽃분 이모...     


꽃분 이모: 뭐~ 

악보가 우리 도서관에 많기도 하고.

한국이 요즘 살기가 좀 팍팍하니? 

그래서 공허로 기억을 잃어버린 망자들이 요즘 너무 많앙~

니 능력이 너~어~무~ 특별해서 우리가 모셔 오는 거니깐!

당당하게 받아들이렴.               



현수의 불안과 의심이 입 안에 든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3     



현수처럼 유년 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불안과 의심이 많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현수는 처음 귀신을 보게 된 이후로 늘 불안했다.
 

친구들 덕분에 귀신과 멀어질 수 있었고, 꽃분 이모 덕에 타인의 기억을 보지 않고 평범하게 살 기회를 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현수는 헤드폰을 쓰지 못한다.

저승의 신분패가 혹여라도 작동하지 않을까 봐 핸드폰 배터리를 강박적으로 체크한다.     


불안은 현수가 짊어진 삶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이 불안을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면 현수는 하씨 아저씨를 찾아갔다.
당시에 하씨 아저씨는 작은 슈퍼를 하고 있어서 아무 때나 가기 좋았다.
 
그래서 자훈이 아버지는 방 사장님이고, 설희 아버지는 하씨 아저씨인지도 모른다. 

현수는 어린 시절 하씨 아저씨가 농담조로 붙여준 별명을 좋아했다.                



하씨 아저씨: 우리 꼬마 사위가 또 왔나?     


현수: (부끄러운 듯) 아저씨이...     


하씨 아저씨: 현수야, 설희가 별로 제?

하기사 가시나 그게 인물도 쪼매... 성깔머리도... 

음~

딸 하나 더 놔달라고 해삘까?

우리 현수를 사위 삼을라믄 그래야제?     


현수: 아저씨~               



현수는 하씨 아저씨가 붙여준 별명, 

‘꼬마 사위’라는 말을 듣는 게 참 좋았다.     



아비가 놓고 간 아이.

귀신을 보는 아이.

남의 기억을 보는 아이.

할미가 무당이지만 무당은 못 하는 아이.     



어린 현수의 머리로도 자신은 선뜻 가족으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을 했었나 보다. 

판산동 사람들이 무당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해도, 


현수는 그중에서도 특이한 아이였으니...     


자신의 선함을 봐주는 하씨 아저씨 앞에서는 사랑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아쉽게도 현수에게 설희는 친남매 같았다. 

또, 어렴풋이 철이 들 때부터 자훈이가 설희를 좋아하는 걸 현수는 느끼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행복이 찾아와도 고슴도치처럼 불안의 가시를 세우게 습관이었던 현수였다. 

그런 현수를 보드라운 강아지 털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보듬어 준 또 한 명은 꽃분 이모였다.     



애교 섞인 다정한 말투.

늘 맛있는 걸 내어주는 손.

귀신과 기억을 보는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준 능력자.     

그런 꽃분 이모가 말한 ‘기보 사서’.



현수는 자신의 불안을 제 머릿속에서 최대한 증발시켜 버리려 했다.    




                

#4



 ‘에휴!

저거 저거 또 걱정과 생각으로 땅굴 파고 있네!’           



 꽃분 이모는 현수가 잠깐 상념에 빠진 시간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아니, 끊을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생각을 숨을 고르는 것처럼 고를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게 길어지면, 생각이 가지를 펼쳐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이 자라게 한다.     

생각을 끊을 때는 끊어야 한다.

현수는 그걸 잘 못했다. 

꽃분 이모는 그런 현수의 상념을 싹둑싹둑 잘 가지치기하는 이였다.               



“찰칵! 찰칵!”               


현수: 이모...?     


꽃분 이모: 어후~ 현수야.

너 어묵 국물 들고 있는 게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배우상이라니깐~ 데뷔 안 해줘서 고맙네~

데뷔했으면 이모가 이 얼굴 자주 못 봐서 상사병 났을 텐데!     


현수: 이모도 참...               



그제야 현수는 어묵 국물을 들이켜며 생각을 잘라내었다.     

샌드위치도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우적우적 잘도 먹었다. 야무지게 떡볶이 국물에도 찍어서 먹고!

그렇게 찬합을 다 비우고 나니 현수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몸에 따듯한 온기가 감돌았다.               



꽃분 이모: 아유~ 잘 먹으니 이쁘다~ 

하여튼 음식해주는 보람이 있다니깐!     


현수: 이모가 늘 맛있는 것만 해줘서 그렇죠.     


꽃분 이모: 배는 부르고?     


현수: 네!     


꽃분 이모: 저기 현수야! 

내일 뭐 약속이나 스케쥴 있어?     


현수: 아니요?     


꽃분 이모: 발령은 오늘부터지만 일은 다음 만월부터야~

요즘 애들은 입사 전에 여행이니 뭐니 간다고 하던데~

여행이라도 다녀와~     


현수: (눈을 번뜩이며) 당장 할 수는 없나요?     


꽃분 이모: 음... 현수 니가 그게 좋으면, 모!

신입 기보 사서의 열정이 좋으네~               



한껏 톤을 올려 말하는 꽃분 이모의 목소리 뒤로 안타까움이 감돈다.

입사 전에 시원하게 여행도 가고 시간을 보내면 좋으련만...

현수가 품고 있는 불안이 꽃분 이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던 모양이다.               



‘기보 사서가 뭔지 1달간 고민하느니 당장 하는 게 나아!’               



그랬다. 

현수는 꽃분 이모가 짐작한 대로였다.

하긴 어떤 문제든 당사자만큼 심각하고 깊게 고민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꽃분 이모: (찬합을 정리하며) 오늘은~

오리엔테이션 정도라고 생각하렴~

다음 만월에 정식 업무는 시작하게 될 거야.

자세한 건 지금부터 설명해줄께!     


현수: 네 좋아요.      


꽃분 이모: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이~

(도시락 짐을 챙기며) 현수야~ 

시간이 늦었지만, 할머니한테는 연락드리는 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앙~

만월 도서관 안에서는 핸드폰이 안 터지니깐~

잠깐 일 좀 보고 같이 연락드리자. 

같이 나갔다 올까?     


현수: 네.

짐 주세요. 제가 들게요.     


꽃분 이모: 바로 쓸 건데...

(짐을 건네며) 현수가 짐을 들어주니 이 이모가 날아갈 것 같네~     


현수: (긴장이 풀린 듯) 이모도 참~                    





#5     



꽃분 이모를 따라 어린이 공간에 불을 끄고 나온 현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현수가 있던 1층 어린이 공간을 뺀 지하와 위층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기저기서 신나게 떠드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망자가 있는 곳에는 빛과 생기가 

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적막만이 있었다.     

지금의 만월 도서관이 망자를 위한 곳이란 게 실감이 났다.

시선을 돌리니 염사서가 보였다. 

그녀는 꽃분 이모에게 서찰 하나를 건네곤 가벼운 목례를 하고 꽃분 매점으로 내려갔다.               



꽃분 이모: 좀 낯설지?     


현수: 네... 좀.

나쁜 의미는 아니고 좋은 의미로요.

밤에는 도서관이 야시장처럼 활기가 가득 차 있네요.     


꽃분 이모: 그러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니깐~

얼른 망자 버스로 가자~     


현수: 네, 이모          



만월 도서관을 나오니 반짝반짝 빛나는 따스한 장막이 라스베이거스의 거대하고 빛나는 분수 쇼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망자 버스로 쪽으로 갔다. 


저승사자들이 환한 불을 켜고 ‘기억 박스’를 쌓고 분류하고 체킹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버스 뒤와 옆으로 이들이 쌓은 색색 가지 박스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흡사 현대 미술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이와 대비되게 사자들은 검은 한복에 검을 차고 종이 두루마리를 보며 일하고 있었다.               



1호 사자: 지청구 만합동에 살던~ 

1960년생 백씨 앞으로 온 게~

기부한 돈과 물품 일체로... 

좋은 기억이~ 사과 박스 크기로 5박스, 맞고!

여기 백씨 또, 강아지 임시 보호부터 아들이랑 요리했던 것까지...      


2호 사자: 체크했어! 

행복한 기억이 5박스. 착한 망자들은 좋은 일한 거 행복한 일이 너무 많아서 다 기억을 못하더라.

만월 도서관에서 좀 먹고 씻고 하면 기억나서 금방 환등기로 흘러... 

(기억 박스를 옮기다) 어! 이거 왜 이래?     


3호 사자: (기억 박스를 들어보며) 그러게요. 

백씨 망자 기억 박스가 2개는 비었는데? 백씨 망자가 왜?

(두루마리를 보며) 아효... 홀로 키운 아들 내외가 교통사고로 죽고 정신을 놨네!

기억을 잃었나 봐.     


1호 사자: 쯧쯧.      


꽃분 이모: (계단을 내려가며) 1호, 2호, 3호, 4호~

다들 고생이 많어~     


저승사자 1호, 2호, 3호: (군대식 경례를 하며) 저승! 

이모님, 1달 만이지 말입니다.     


꽃분 이모: 그르게용~                

까만 한복과 인사 방식 때문일까? 



마치 퓨전 사극의 군대 같은 풍경에 

현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4호 사자: (운전석에서 내리며) 꽃분 이모님!!!     


꽃분 이모: 고생이 많아용~

현수야, 가방에서 그 도시락 좀 하나씩~ 나눠 드려.     


현수: (웃음을 참으며) 네.

여기 받으세요.     


저승사자들: (순정 만화 눈망울로) 고마워요. 청년~     


꽃분 이모: 어머~ 청년 아니야.

이번에 새로 온~

망자에게 기억을 빌려 줄 ‘기보 사서’님이야~     


저승사자들: 네? 이분이요!?               



저승사자 넷은 갑자기 눈빛을 교환하더니 

도시락을 바닥에 내려놓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승사자들: 예를 갖추겠습니다. (경례 포즈) 저승! 

(무협지처럼 칼 동작을 하고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기보 사서님을 뵙습니다.     



저승사자들은 현수를 앞에 두고 맨바닥에서 절도 있게 무협지 인사를 올렸다.     

현수 움찔했다.

자신이 대장군이라도 된 것 같은 인사를 받아서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