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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the record
Dec 10. 2024
17. 염라대왕의 사관과 염사서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현수가 만월 도서관에서 엽서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이,
엽서 이야기를 하던 제주도의 자훈과 집에 있던 설희는 강제 기절 상태였다.
또르륵 딱.
또르륵 딱.
두 번의 팥알 굴러가는 소리가 난 이후, 불이 꺼진 방자훈의 호텔 방에 한기 어린 안개가 바닥에 소복이 깔렸다.
제주의 밤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만월의 달빛이 드리운 방바닥의 깔린 안개가 마치 저승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 방 한가운데에 기척도 없이 쓰러진 방자훈이 있었다.
그의 옆에는 푸르다 못해 시린 쪽빛 두루마리와 갓을 쓴 저승 사관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조용한 파도 소리만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언뜻 파도 소리가 잦아드는 듯 보이자, 돌부처처럼 서 있던 저승 사관이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주의 밤바다에 비친 만월이 마치 금빛 길을 낸 것 같이 길게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그 금빛 길을 따라서 염라대왕의 령이 한 걸음이 천 걸음인 듯 파도를 숨죽이게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이승에서는 본체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마치 반투명한 쉬폰 커튼의 한 자락처럼 유령처럼 그렇게 ‘령’의 모습으로 이승에 내려오곤 했다.
그도 여의찮으면 저승사자의 몸을 빌려 언령을 했다.
염라대왕의 령이 금빛 길의 끝에 닿자 스르륵 바람을 가르며 방자훈의 호텔 방 창문을 통과에 방으로 들어왔다.
저승 사관: (무협지 인사처럼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저승.
염라대왕: (인사를 물리며) 되었다.
이 치는 어찌 된 것이냐?
저승 사관: 예.
방자훈 군이 오늘 발령 받은 기보 사서님이 있는 만월 도서관으로 하설희 양을 보내려 하였사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우선 잠에 들게 하였나이다.
염라대왕: 잘하였느니라.
둘은 그날 일을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였느냐?
저승 사관: 아니옵니다.
현수 군이 기억을 보고 빌려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발설한 적이 없사옵니다.
오늘 현수 군이 집에서 설희 양과 마라 로제 떡볶이를 먹을 때도 옆에 있었습니다. 하오나 기억 이야기는 엽서 이야기 외에는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염라대왕: 알겠느니라.
‘딱!’
염라대왕이 손가락 스냅을 한번 튕기자, 바닥에 쓰러져있던 방자훈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리고 슬슬슬 날아올라 침대 쪽으로 가자, 이불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침대에 방자훈이 부드럽게 안착하자 마치 깃털이 떨어지듯 천천히 이불이 내려와 자훈의 몸을 덮었다.
#2
염라대왕: 엽서는 알아보았느냐?
저승 사관: 그것이 조금 이상하옵니다.
염라대왕: 무엇이 이상한고?
저승 사관: 분명 현수 군의 신 할머니가 있는 부산 영도에 엽서의 기운이 있었으나...
염라대왕: 있었으나?
저승 사관: 어떻게 된 일인지 엽서를 쓴 흔적도 보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염라대왕: 흔적이 없다?
저승 사관: 예, 염라 대왕님.
송구합니다.
염라대왕: 송구할 필요 없다.
너는 저승사자도 아니고, 저승 사서도 아닌 저승 사관이다.
나의 허락 없이도 저승의 심판을 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심판관이다.
그대가 찾을 수 없었다면?
필시 산 사람도 저승도 개입할 수 없는 무언가였을 터.
저승 사관: 예.
염라대왕: 사관, 자네는 이제 영도를 떠나 방자훈, 이자 곁에 머물도록 하거라.
하설희야 염사서와 언니 동생이 되어 괜찮다만은.
이자는 거처도 만나는 사람도 만월 도서관의 사서들이 가까이서 지켜볼 수 없는 자리에 이르렀다.
이자 주변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만한 이가 있는가?
저승 사관: 자훈 군의 매니저가 가장 좋을 듯하옵니다.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가죽 시계를 늘 차고 있어 그곳에 머물고자 합니다.
염라대왕: 알았네.
염라대왕은 할 말을 다 하고 떠나는 듯하다가 침대맡에 놓인 시집들과 노트를 보며, 한풀 딱딱함이 풀린 듯했다.
염라대왕: (노트를 보며) 하루살이라...
자훈이 이 놈은 아직도 시집을 읽나? 작사도 하고?
저승 사관: 예, 자훈 군도 현수 군과 같이 어릴 적부터 만월 도서관을 자주 가지 않았습니까?
설희 양도 그렇고요.
사춘기 지나면서 트로트 가수 하겠다고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 되면서...
그 설움을 위로받으려 그랬는지 시집을 밥 먹듯이 만월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읽었습지요.
그러면서 자훈 군이 어느샌가 직접 작사하며 히트곡을 쓸 수 있게 된 듯하옵니다.
염라대왕: 사관은 나이가 곧 서른인 자들에게 아직도 자훈 군, 설희 양이냐?
그리 정이 들어서 공정하고 냉철해야 할 저승 사관 노릇을 할 수 있겠나?
저승 사관: 사관으로서 많은 자들을 보고 즉결 심판을 했습지요.
헌데 이 아이들만큼은 그 어떤 상황에도 심판받을 짓을 하지 않아 그런가...
정이 들었다고 보신 게 맞을 듯하옵니다.
염라대왕: 사관, 보통 산 사람은 다들 얘네처럼 심판받을 짓을 안 하고 사느니라.
니가 악귀부터 간악한 자들만 너무 많이 보아 그런 것이다.
저승 사관: 그러면 어떻습니까?
저는 이 아이들을 무심하게 지켜보면, 안식년의 저승 사서들 만큼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을요.
염라대왕: 그래? 그래서,
(사관의 화살집을 보며) 응원봉까지 샀느냐?
저승 사관: 어, 언제 보셨습니까?
염라대왕: 사관, 내가 염라대왕인 걸 잊은 게냐?
숨겨도 다 보이느니라.
내일 그래서 누구 몸에 깃들어 볼 것이냐?
저승 사관: 깃들다니요~
현수 군의 할머니가 옆자리를 하나 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방에 단 장인이 만든 가죽 노리개에 제 몸을 의탁할 생각이옵니다.
염라대왕: 그거나 그거나.
네놈이 이제 자훈이 콘서트를 보겠다고... 에이그!
자!
염라대왕이 그 큰손으로 저승 사관의 삿갓을 내리치는 듯했다.
#3
저승 사관은 크게 혼이 나는 줄 알고 몸을 움츠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삿갓에 무언가 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승 사관: (삿갓을 더듬으며)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염라대왕: 뭐긴 뭐야.
CCTV 노릇을 해줄 조개 패(자개)이지.
삿갓의 가장 꼭대기에 미러볼 같은 자개알이 눈깔 사탕만한 크기로 있고, 그 주변을 은과 함께 비취옥, 산호로 세공되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CCTV(?) 였다.
저승 사관: (손으로 만져 보며) 이리 값비싼 것을...
같이 가시면 될 것을요.
염라대왕: 사관. 이번 콘서트에 자훈이가 무당촌네 사람들을 다 부르지 않았더냐.
네 놈 하나는 홍판덕, 그 현수 할미가 용한 무당이라 어찌 노리개에 숨겨준다 해도 나는 어려울 것이야.
저승 사관: (한쪽 무릎을 꿇고) 소신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염라대왕: 되었다.
설희는?
저승 사관: 염 사서에게 연통을 넣어놨습니다.
염라대왕: 그래.
염사서라면 괜찮겠구나.
(옷자락에서 꺼내 던지며) 받거라.
저승 사관: (제 자리에서 날아올라 받으며) 이것은?
저승 보검이... 아닙니까?
염라대왕: 저승 최고의 궁수인 저승 사관에겐 검이 필요치 않으나.
기운이 좋지가 않아...
민현수가 기억을 빌려주는 능력을 쓰게 된 이상 귀문도 함께 열리게 되니.
필시 잡귀와 악귀들이 몰려들 것이야.
활만으로는 되지 않는 근접전을 할 일이 생길 게야.
저승 사관: (무협지식 인사를 하며) 저승!
그 누구도 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염라대왕: 되었다.
현수뿐만 아니라 자훈이도 좋은 아이이나 귀신과 가까이 산 아이니.
악귀와 잡귀가 쉬 엮일 것이다. 잘 감시하도록 하여라.
사관, 그대는 저승의 으뜸가는 인재다.
그대는 나의 눈과 귀이며, 저승 사서 10명이 넘는 몫을 하는 인재임을 잊지 말라.
저승 사관: (무협지식 인사를 하며) 저승!
말이 끝나자 홀연히 염라대왕은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니 방이 더운지 자훈은 이불을 걷어찼다. 사관은 손가락 스냅으로 자훈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리고 저승 사관은 연기가 되어 자훈의 방 틈으로 빠져나와 홍여사의 객실로 들어갔다. 홍여사가 미리 놓아둔 소파 위의 가방에 달린 가죽 노리개로 쓱~ 하고 깃들었다.
이 가방은 자훈이네가 선물한 그 가방이었다.
잠결에 약간 추위를 느꼈는지 홍여사는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 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관님요, 잘 주무시소.”
#4
같은 시각 염사서는 일을 하다 말고 받은 저승 사관의 전갈 하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바로 하설희의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요 몇 년 동안 아무런 언질도 없으셨는데!
갑자기 무슨 일로 우리 설희를! 얘는 괜찮은 걸까?
하...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는구나!’
염사서가 만월 도서관에 부임하고 얼마 안 되어 염라대왕은 그녀에게 하설희를 지켜보라 명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저승 사관에게 보고토록 했다.
이 건에 대해서 염사서에게 만월 도서관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함구령 또한 내렸다.
저승 사관이라니.
저승의 염라대왕으로 통하는 핫라인과 그 자체인 분이다.
그를 통해 하설희를 지켜보고 보고하라니! 도대체 이 설희라는 아이가 뭐길래 이러나 싶었다.
한술 더 떠서 방자훈은 사관님이 직접 붙으신다니! 염사서는 애꿎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거두었다.
굳이 알 필요 없는 걸 긁어 부스럼으로 알게 되었을 때 짊어져야 할 비밀의 무게가 싫어서다.
다만 곤란했던 것은 염라대왕의 명은 있었으나... 특별히 보고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하는 게 없는 설희 때문이었다.
집-도서관, 집-도서관을 반복하는 취준생에게 뭐가 있겠나?
연예 전선은 1도 없는 아이라 하설희에 대한 보고를 한 달을 써도 집-도서관, 집-도서관 외엔 쓸 말이 없었다.
염사서 성격상 아무리 그래도 대충할 수는 없었다.
하설희가 만월 도서관에 올 때마다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도 하고 신청 도서 목록에 올려주곤 했다. 또,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무료 강좌도 여럿 추천해 줬다.
당시 하설희는 추리 소설가를 꿈꾸다 좌초된 배 마냥 꿈을 저버린 상태였다.
정말 소설이 오지게도 안 팔렸기 때문이다.
대중의 무반응에 설희는 빠르게 꿈을 접고 일반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무기력한 취준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염사서의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겠나?
마침 설희는 도서관에서 취준생 준비 공부를 하고 있어서 염 사서랑 거의 매일 얼굴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붙어 다니던 현수는 말년 병장을 하고 있어서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방자훈은 사실 어릴 적부터 꿈이 트로트 가수였다며 다 커서 가출(?) 아닌... 내쫓김을 당해서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자훈이는 시집을 빌리기 위해 만월 도서관에 자주 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땐 둘 다 젊음의 암흑기를 지나고 있던 터라 서로 먼저 만나자, 하질 않았다. 마주치면 그저 눈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이때 설희는 거의 양쪽 날개를 잃은 새나 다름없었다.
염사서는 그 시절의 하설희를 떠올리며 오늘, 고양이 밥때를 놓친 집사 마냥 동동거리며 움직였다.
오 관장이 슬며시 다가와 염 사서에게 말했다.
오 관장: 염사서, (고운 보자기 2개를 건네며) 자!
이거 4층 관장실에 좀 놓고 와줘요. 오늘따라 매점이 번잡스러워서 물건 둘 데가 없네.
염사서: (기뻐하며) 관장님!
오 관장: 무거우니까 엘리베이터 타고 가요. 염 사서.
염사서: 네!
이 바쁜 만월 밤에 뭣 하러 짐을 관장실에까지 가서 둘까? 오 관장이 염사서에게 잠깐 쉬는 시간을 준 것이다.
염사서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에 타서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조명이 꺼지며 붉은 비상 조명이 들어왔다.
이 버튼은 저승 사서들이 급하게 저승사자로 분해야 할 때만 쓴다. 꽃분 이모처럼 높은 직급이 아니면, 저승사서는 그믐날 외엔 선글라스를 벗을 수 없다.
염사서는 선글라스를 벗고 순간 이동을 감행했다.
#5
눈 깜짝할 사이에 설희네 집에 저승사자의 모습을 한 염사서가 나타났다.
그녀의 시선에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쓰러진 하설희가 걸렸다. ‘으이구!’하는 염사서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했다.
염 사서가 나타나자 추운 듯 하설희가 몸을 움츠렸다.
염사서는 부엌으로 가서 오븐 장갑을 끼곤 하설희를 조심스레 공주님 들기를 해서 침대에 눕혔다.
설희 책상 의자에 있던 담요를 살짝 덮어주고 난 후 팥알 하나를 던지고는 염사서는 사라졌다. 방 안의 온도가 기분 좋게 포근하게 변했다.
부드럽고 조용한 일 처리였다.
하지만
설희는 살며시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