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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Dec 10. 2024

16. 사서 제안을 받고 주저앉은 현수 3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6. 사서 제안을 받고 주저앉은 현수 3      

         

#1     


‘아까 꽃분 이모가 말했던 거구나...’     

          


민현수는 종이의 내용을 보고도 그리 동요하지 않았지만, 염사서는 달랐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염사서였다.        

       


‘기보 사서?

진짜 오늘은 설마가 사람 잡는 날이네! 

망자의 기억을 빌려주다니...

무당의 몸을 빌려 미련이 많은 망자의 기억은 간간이 본다지만...

빌려준다고?

민현수씨는 신기가 없는데...

진짜 산 사람이 맞는 건가?’



염 서사가 침묵한 지 얼마쯤 되었을까?

현수가 어색한 공기를 환기하려 염사서가 가져온 보리차를 들며 말을 건넸다.    



           

현수: (보리차를 마시며) 고마워요. 

염사서님.     


염사서: 아! 네. 현수씨.

죄송... 해요. 제가 좀 생각을 하느라.     


현수: 네.

천장에서 떨어진 서류 때문이죠?   

  

염사서: 그렇긴 한데...

아! 아!

현수씨, 이번이 첫 취업인 거죠? 

축하드려요.  

   

현수: 감사해요. 염사서님.     


염사서: 제가 오늘 좀 이상하죠. 

죄송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전달받은 바가 없어서 그래요.

아마 직무 메뉴얼 같은 건 꽃분 이모가 가지고 오실 거예요.

공문이 온 거니깐 믿으셔도 돼요.     


현수: 네... 음...

(염사서님이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보네...)

흔치 않아서 그런 거죠? 

기억을 빌려주는 사서라는 게?     


염사서: 아!

만월 도서관은 그런 곳이니까! 괜찮아요.

망자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이런 도서관도 전국에서 여기 한 곳뿐이잖아요.

뭐든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이죠!     



          

염사서 다운 발언이자 만월 도서관답다.


상대방이 부담가지지 않게 말하면서도 부풀리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지금의 염라대왕이 후계자로 꽃분 이모를 점 찍었다면? 

꽃분 이모는 만약 자신이 염라대왕이 된다면? 

오 관장은 참모로 데려가고, 다음 만월 도서관 관장으로 점 찍은 게 염 서사였다.       




             

#2     


저승 사서는 전국에 있는 도서관에 2명씩 배정된다. 

사서일 때도 있지만, 행정 일을 하거나 방범 업무를 보기도 한다. 산 사람인 사서들은 저승 사서가 자신과 다른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만월 도서관의 경우만 특별히 저승 사서가 관장도 한다.


전국에서 모여든 망자들을 만월에 저승으로 올려보내는 곳이라서 만월 도서관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저승 사서의 수도 20명 가까이 된다. 만월 도서관부터 뒷 건물에 있는 만월 문화센터의 홍란 목욕탕, 수영장, 헬스장, 문화 강좌까지 모두 운영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 사서는 두어 명밖에 되지 않는다.     


요즘은 아니지만, 

예전에 한국의 도서관 사서들은 도서관과 연계된 문화센터의 헬스장, 수영장, 거기에 딸린 목욕탕까지 관리했다.     


만월 도서관은 아직 그 시스템을 망자들을 위해 예외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판산동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밀집되어 있고, 주변이 온통 한옥 일색이라 이렇다 할 대규모 문화시설을 더 지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만월 도서관 바로 뒷 건물인 만월 문화센터에 이들 시설이 한데 모여있었다.   

  

홍란 할매는 지하의 목욕탕을 관리했고, 

덕팔 삼촌은 1층에 자리한 수영장과 2층의 헬스장 담당이었다.

춘봉 아재는 1층 로비에서 방범을 담당하는 방범계장을 하며 3층부터 자리한 저승 사서들의 관사와 망자들을 위한 쉼터를 관리했다.     


도서관 사서는 순환보직이다. 

2년마다 한 번씩 옮겨 다니는데 저승 사서도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한적함을 즐기러 산골 도서관도 가고, 젊음을 느끼려 대학 도서관에 가기도 한다. 물론 제주도를 희망하는 저승 사서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인 사서들과 똑같이 고가로 평가받고 순환하기에 저승 사서들의 원대로는 할 수 없다.     


만약 만월 도서관에 있고 싶다면?     


저승 사서 일을 잘해서 인사고과를 잘 받으면 순환보직 때 신청할 수 있다. 

즉, 만월 도서관은 저승 사서들 사이에서도 일 잘하는 사서만 올 수 있다.         




           

#3     


‘똑똑~’      


         

염사서: 어! (혼잣말로) 홍란 할매가 오셨나?

현수씨 잠시만요.

네~ 나가요.     


홍란 할매: 어~ 염사서 나야~ 홍란   

  

염사서:(어린이 공간 문을 열며) 홍란 할매!

바쁜 시간에 죄송해요.     


홍란 할매: (어린이실로 들어오며) 으응~ 괜찮아.

덕팔이랑 춘봉 아재를 시켜서 우선 매점이랑 목욕탕 돌아가게 해놨어.

현수야! 괜찮아?     


현수:(자리에서 일어서며) 홍란 할매 오셨어요?   

  

홍란 할매: 앉아. 앉아!     


현수: 네... 

(엉거주춤 앉으며) 좋은 날인데... 죄송해요.    

 

홍란 할매: 만월은 매달 온다. 괜찮아!      




              

#4     


홍란 할매가 어린이실로 들어왔다.


판산동과 만월 도서관을 통틀어 제일 맏언니이자 대모 같은 사람이 홍란 할매였다. 홍란 할매는 목욕탕을 담당하는 저승 사서이다.     


현수의 할머니인 홍판덕 여사는 이 만월 도서관과 홍란 목욕탕 두 곳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예전 현수를 구해준 일에 대한 답례였다.     

그런 홍 여사의 손자 현수가 과호흡이 왔다니, 대모인 홍란 할매가 행차할 수 밖에!         


      

홍란 할매: 아이구... 현수야, 갑자기 왜 식은땀을 이리 흘리니?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며) 오 관장한테 대충 들었어.

(종이를 슬쩍 보며) 이거구나! 

기억을 빌려주는 사서, 기보(祈報) 사서라... 염라가 칼을 빼 들었구나!

현수야, 취업을 축하한다. 

우리 판덕이가 어깨춤을 절로 나겠구나!   

  

현수: 네...     


홍란 할매: 왜 이렇게 죽상이야...

꽃분이는 이 좋은 날 왜 저승으로 날아갔다니...               

현수가 깊게 고개를 떨구었다.

홍란 할매와 염사서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염사서: 할매 오셨으니까. 

저 오 관장님 좀 가볼게요.     


홍란 할매: 어~ 그래그래.

염사서가 있어야 오 관장이 살지.

그 양반이 안 하던 거 하느라 지금은 안 도와주면 내일 앓아누울 거야.

어서 가봐.    

 

염사서: 네, 할매.

현수씨 저 오 관장님께 잠시만 다녀올게요.

우리 홍란 할매랑 계세요.     


현수: 네, 염사서님.       




             

#5   

  

짜여진 각본처럼 홍란 할매와 염사서가 말을 주고받고 자리를 피해주니...

둘만 남은 어린이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홍란 할매는 또다시 난 현수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홍란 할매: 오늘도 이상한 소리 들리고 숨이 막 턱턱 막혔다며?

산 사람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그 속이 문드러진다!

판덕이한테도 내가 할머니뻘이다.

그래서 이 홍란이는 놀랄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다.

염라 그게 뭐라고 했건 간에 니 속에 든 거 말을 해야 니가 산다.  

    

현수: ... 네.   

  

홍란 할매: 현수야. 

저승 것들이 한 말 다 잊어버려라.

산 사람이 제대로 사는 것처럼 사는 게 먼저야.

삶이 먼저지 죽음이 먼저가 아니란다.

삼라만상의 이치가 그래. 사는 게 늘 먼저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수는 피를 토하듯이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현수에게 해주지 않을 말이었다.   


            

‘숨겨야 한다. 네가 기억이 보이는 걸 꼭 숨겨라.’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너도 영혼이 빠져나가지 않게 조심해라.’



...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현수의 마음을 좀 먹어갔다.

현수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지만...


비밀이 많아진 현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혼자 같았다.      

홍란 할매는 그렇게 우는 현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줬다.     


얼마나 울었을까?

현수가 다소 후련해진 듯한 얼굴로 입을 뗐다.       


      


       

#6     


현수: 홍란 할매.

어제 저녁에 제게 엽서가 한 장 왔어요.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가는 

만월에, 꽃분 이모가 제가 ‘기보 사서’가 됐데요.   

  

홍란 할매: 이런!

저승 일이 산 세상에 먼저...

꽃분이가 쌍심지 켜고 저승에 (말을 멈추며) 흠! 

기억을 어떻게 보고 어떤 기억을 빌려줘야 하는지 알려주는 줬고?

판덕이가 너 신기 생겼다고는 안 했는데...     


현수: 그건, 음.

제가 초등학생 때 헤드폰 잘못 써서 영혼이 나갔던 날 기억하세요?    

 

홍란 할매: 암~ 기억하지.

그때 너 요리조리 도깨비불 마냥 날아다녀서 잡느라 고생했지~     


현수: 할매, 저 그날 이후로요.

글자가 쓰여진 건 뭐든 그걸 만진 산 사람의 기억을 원치 않아도 보게 되고, 제 기억을 빌려줄 수도 있게 됐어요. 

망자의 것은 해본 적이 없지만요.  

   

홍란 할매: 아이구, 힘들었겠구나!

안 볼 수는 없고?     


현수: 그게요.            


   

현수는 말을 해야 할지 말지 또 고민이 됐다.    

           


‘만약 염라대왕이 이 말을 한 걸 알고 홍란 할매를 벌하면 어떻게 하지?

괜찮을까?

나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그때 문득 꽃분 이모가 헤드폰 사건이 지나고 해준 말이 떠올랐다.     


          

“현수야, 만약~ 무슨 큰일이 생겼는데, 이 이모가 없잖아?

그러면 홍란 할매한테 해.

우리 할매만큼 저승도 이승도 잘 아는 사람이 없어.

홍란 할매는 믿어도 돼.”    


           

현수는 걱정을 멈추고 홍란 할매에게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소 부은 눈에 생기가 돌았다.          




          

#7     


현수: 꽃분 이모가요. 

염라 대왕님한테 간청해서 귀신도 기억도 막아주는 저승의 신분패를 만들어 줬어요. 

이렇게(핸드폰을 보여주며) 도서관 어플로도 돼요.   

  

홍란 할매: 아이구.

꽃분이가 애 많이 썼구나.       


         

현수는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지면... 누군가의 기억도 귀신도 원치 않아도 보게 되었다. 

또 영혼이 빠져나갈까 염려하는 이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삶을 살아온 현수였다.     

보호가 비밀이 된 현수에게 강박증이 찾아왔다.

현수의 핸드폰 배터리 강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밀어닥쳤다. 훅!     


          

“할매~ 

그런 건 꽃분이 앞에 대놓고 좀 해줘요~”      


         

홍란 할매: 어이구 깜짝이야!

(등짝을 때리며) 기척도 없이! 

이 늙은 할매 죽일 일 있어?    

 

꽃분 이모: 아야야~

우리 할매는 나 없을 때만 꼭 내 칭찬하니깐~

궁금해서 그랬죵~     


현수: (와락 끌어안으며) 꽃분 이모!   

  

꽃분 이모: (현수 등을 쓰다듬으며) 으응~ 현수야~   

  

홍란 할매: (자리를 읽어서며) 현수 일 알려줘야 할 테니,

(눈인사하며) 나는 내려가 본다?     


꽃분 이모: 그럼요. 할매!

밑에 전쟁통이에요!     


홍란 할매: 오이야~ 내가 전쟁 쫑내러 내려가마.

현수야, 있다가 꽃분이랑 목욕탕 한번 들려라.  

   

현수: 네. 할매.               



그렇게 홍란 할매가 자리를 비켜줬다. 

꽃분 이모와 현수는 할매를 배웅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꽃분 이모: (현수 눈을 보며) 울었구나?

그래. 남자가 좀 울고 그래야지.

남자가 여자보다 덜 울어서 스트레스로 빨리 죽는다는 뭔 어디 대학 연구도 있더라.

     

현수: 이모...     


꽃분 이모: 사람이 울었을 때는 말이야.

기름지고 달고 약간 매운 탄수화물 덩어리를 먹어야 하거든?

내가 이거 하느라 조금 늦었어!            


   

현수가 말할 새도 없이 꽃분 이모가 

커다란 1단 찬합 1개, 국물용 밀폐용기 2개를 주섬주섬 꺼냈다.    

 

1단 찬합에는 돈가스 샌드위치가 담겨 있었다. 현수가 보상 심리가 발동할 때마다 꼭 먹는 메뉴였다.      

그것도 민현수가 딱 좋아하는 취향으로!  

   

식빵 한 쪽은 잡곡이 알알이 박힌 호밀빵에 고소한 마요네즈를 발랐다.

다른 한쪽 흰 식빵에는 돈가스 소스를 듬뿍 발랐다.

돈가스는 등심과 안심 돈가스 한 장씩을 넣었는데 돈가스 사이에는 시큼한 X* 소스가 살짝 발라져 있어서 느끼함을 잡았다.

이 두꺼운 돈가스 샌드위치는 흐트러지지 않게 가운데 이쑤시개가 콕 박혀 있었다.     


국물용 통에는 새콤달콤한 국물 떡볶이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현수는 돈가스 샌드위치를 한번 베어 물어 먹은 그다음에는,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었다. 이걸 반복해서 야금야금 먹는 걸 현수는 즐겼다.     

다른 통에는 맑은 디포리 어묵 국물에 후추, 파, 고춧가루, 튀김 가루가 듬뿍 뿌려져 있었다.     


          

꽃분 이모: 자자! 여기 있어. 

(커다란 머그컵에 어묵 국물을 따르며) 너 국물 킬러잖아.     


현수: 이모는 진짜...       


        

현수는 또 한 번 울먹였다. 

이 다 큰 청년의 눈가가 또 촉촉하다.     


               

“이모가... 

너가 말 안 해도 좋아하는 거 하나하나 다 알잖아?

비밀이었던... 기억보는 거!

이제는 그 능력 발휘하면서 그러면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왔데.

너 힘든 일 안 겪게 잘 이끌어 줄게.

우리 민 사서님!”      


            

너스레를 떨며 꽃분 이모가 현수 손에 어묵 국물을 쥐여준다.

현수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슴 깊이 숨이 쉬어지는 기쁨의 순간이었다.

비밀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늘 불안을 안고 살았던 현수는 습관처럼 이 행복 뒤에 서린 또 다른 불안을 찾아내었다.   


            

‘이모가... 

엽서에 대해선 왜 아무 말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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