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로로?
딸아이가 짜증이 심하거나 울 때 가끔 티브이를 틀어준다. 내가 '뽀로로'라고 외치면 울음을 멈추고 근처에 있는 리모컨을 내 손에 쥐어 준 뒤 침대 머리맡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화면이 켜지길 손꼽아 기다린다. 아이들은 똑같은 장면을 봐도 그 속에서 항상 새로운 면을 찾아내 반복해서 봐도 지루해하지 않는다고 하길래 나도 그때그때 영상 속에서 다른 모습을 찾고자 노력하니 여러 번 보고 들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방에 걸린 액자, 액자 안의 풍경과 사람들, 등장인물 주변에서 움직이는 액스트라들의 몸짓과 표정을 보면 볼 때마다 새롭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인물의 몸짓과 표정이 너무 디테일한 것 같다. 그만큼 사람의 행동과 기분에 따른 표정을 연구하고 만든 결과 물이겠지만, 저땐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을 치켜뜨며, 어깨와 손짓을 저렇게 하는구나 라며 나도 인식하지 못했던 표정과 몸짓들을 보며 매번 감탄하곤 했다.
얼마 전 룩셈부르크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호텔 방안에 있던 티브이로 유튜브를 켰는데, 난 내 계정이 이미 저장되어 있는 줄 알았다. 모아나, 코코, Sing 등 우리 딸이 요즘 즐겨 보던 노래들이 있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정을 확인해 보니 등록되어 있던 건 없었다. 아마도 이전에 온 가족이 틀었구나, 다들 우리랑 비슷한 걸 보는구나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 딸 옆에 앉아 같이 화면을 보며, 웃기고, 신나고, 슬퍼서 때론 눈시울을 적시거나, 추억이 생각나게 했던 작품 몇 가지를 되새겨 봤다.
"당신들은 꿈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나요?"
라푼젤에 나오는 장면 중에 하나인 I've got a dream을 부르는 부분은 라푼젤이 위기에 처한 남자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악당들에게 "당신들은 꿈이란 걸 가져 본 적이 없나요?"라고 물어보며 시작한다.
성질 나쁘고 세상 못된 짓을 다하고 다닌 두목은 만지기만 해도 피아노 건반이 다 부서질 것 같이 무섭게 생겼지만, 그의 어릴 적 꿈은 모차르트처럼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못생기고 발가락이 여섯 개인 코 큰 남자가 언젠가는 나도 아담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겠지 라며 자신의 꿈을 외친다. 꽃장식 전문가, 실내장식가, 판토마임, 케이크 전문가, 뜨개질, 바느질, 유니콘 인형 모으는 것, 햇살이 부신 멋진 섬을 사서 돈에 깔려 혼자 살아보는 것 등 우린 어릴 때부터 각자 그렇게 꿈이 있었고, 결국 알고 보면 서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맞다. 나도 어릴 적에 몇 가지 꿈들이 있었다. 나이를 먹고 그 꿈들이 뭐였었는지 가물가물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이 각자의 꿈을 발표하라고 했을 때 내가 말한 꿈은 판사였다. 세상에 나쁜 사람들을 심판하고자, 정의의 판사봉을 들리라! 당시 같은 반 친구들이 서로 싸우거나 논쟁이 생기면 선생님께서 교실 법정을 만드셨고, 서로 자기주장만 내세웠기에 상황에 따른 해결책이 필요했다. 당시 반장이었던 내가 앞에 나와 각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교실 투표를 실시하며 판사 역할을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 후에 난 판사보다도 나 자신이 행복한 일을 꿈꿨고, 그 일을 지금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내 가족을 위해 또 다른 꿈을 가져봐야겠다.
"날 기억해요"
디즈니 만화 Coco에 나오는 remember me라는 이 노래는 아주 짧지만, 몇 가지 임팩트 강한 버전이 있다. 하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빠가 딸과 함께 노래를 부르던 그날을 회상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그 딸이 어느덧 증조할머니가 되어 증손자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얼굴에 온통 쭈글쭈글 세월의 흔적을 지닌 체 힘없이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마마에게 꼬마는 말한다. "마마가 파파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는 우릴 영영 떠날 거예요. 꼭 그를 기억해야 돼요 마마" 무표정에 미동도 없는 마마에게 꼬마는 어릴 적 파파가 마마에게 들려주었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Remember me (날 기억해요)
Though I have to say goodbye
(내가 떠나야 할 지라도)
Remember me (날 기억해요)
Don't let it make you cry (제발 혼자 울지 말아요)
For ever if I'm far away (몸은 저 멀리 있어도)
I hold you in my heart (내 마음은 네 곁에 머 물테니..)
I sing a secret song to you (조용히 노래해줄 께요)
Each night we are apart (매일 밤마다)
Remember me (날 기억해요)
Though I have to travel far (내가 어디에 있든)
Remember me.. (날 기억해요)
손 끝에 미동이 일고, 조금씩 마마는 생기를 얻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데, 난 스토리 전체를 알지 못했어도 마음 한구석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과 함께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난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하늘나라로 떠나셨고, 그날 학교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까지 울면서 뛰어간 장면들. 어린 나이였지만, 할아버지와 등산 간 기억과 옛날 집에 있던 아주 두꺼운 솜이불 속에서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까꿍까꿍 거리며 할아버지께 재롱을 떨었던 그 시절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할아버지는 아직 내 기억에 남아 있기에 내가 죽기 전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걸까. 그럼 나중에 우리 딸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그 손자 손녀가 죽기 전까지 날 기억한다면, 나도 아직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