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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Mar 09. 2022

'개천용' 서사의 이면

헌신하다

'청소하는 엄마들'이 쉬는 시간에 모이면 자주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자식들의 직업이다. 사실 거기서 그들의 등급이 결정된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자신이 성공했음을 증명하려 한다. 자신의 직업보다 자식의 직업으로 그들끼리 자연스럽게 급을 나누려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청소일을 한다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닌 셈이다. 그런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이렇게 정의한다. 천하다. 밑바닥이다. 하찮다. 열악하다.


"우리 애만큼은 내가 하는 일 안 시키려고, 손발 부지런히 써가며 뒷바라지한 거야."


이때 자식을 뒷바라지한 대가가 초라한 엄마는 자연스레 입을 닫게 된다. 특히나 부모가 하는 일이 그렇듯 몸 쓰는 직업이 자식에게까지 대물림됐을 때는 오히려 돈 없고 '빽' 없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탓한다. "못난 부모 만나서 못난 꼴만 닮네." 세 남매를 키운 순자는 그중에서 막내아들을 대학에 못 보낸 것이 한이었다. 사십 줄에도 몸 쓰는 일을 하는 아들을 보면, 평생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정형외과 의사, 고등학교 교감선생님, 기업 회장 아들들을 키워낸 정희의 자식 뒷바라지 일화는 그녀가 일을 그만둔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아파트에서 회자된다. 모범적인 엄마상의 표본으로 말이다. 그녀와 잠시간 같이 일했던 영미가 정희의 일화에 살을 붙이고 떼어서 입에 침이 닳도록 구전한다. 신입이 들어올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처럼 말하고 다녔다.


지난 60년간 정희는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도 했고,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그것으로도 돈이 모이지 않자 일거리가 나올 때마다 마다하지 않고 쉼 없이 일했다. 아파트, 빌딩, 상가, 가리지 않고 청소도 했다. 그렇게 그녀가 남편 없이 헌신적으로 여섯 남매를 뒷바라지한 결과 의사, 교감선생님, 기업 회장이 된 아들들의 스토리는 개천에서 용 난 사례의 전형이라 부를 만했다.


하지만 정희는 그녀의 세 딸들에 대해서는 좀체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거에 가난했던 부모가 자식, 특히나 맏아들 또는 다른 아들들에게 집안의 모든 자원을 몰아주었던 시대상에서 그녀의 세 딸들도 현실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 같다.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 자식 중 한 명이라도 용으로 키워내기 위한 '나름의 최선책'은 여성들을 당연하게 희생시켰다. 엄마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딸은 오빠와 동생을 위해. 그 경험은 아직도 고령의 청소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통용된다.


사실 헌신한 엄마가 존재해야 개천에서 용 난 사례는 힘을 얻기 마련이다. 그때의 헌신은 부모가 초라해야 값어치가 더 커진다. 개천용 서사는 부모의 삶이 고달파야 스토리의 완결성이 더 높아지는 셈이다. 결국 엄마의 헌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가 해야 했던 일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 부모의 헌신성을 가늠하는 척도는 그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희가 시장에서 노점상으로 생선을 팔려다가 자릿세를 요구하는 건달들과 한바탕해야 했던 사건이나,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자기 자식 또래의 주인집 아들이 풀고 버리려던 수험서를 사정해서 얻어온 후 맏아들에게 주며 "무조건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다그친 일화 같은 감동의 스토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며 자식을 키워낸 불굴의 엄마 때문에 자식이 출세할 수 있었다는 눈물겨운 스토리는 강력한 서사성을 부여한다.


분명한 건 이런 유형의 성공 스토리가 구전될수록 부모의 헌신적인 이미지만 남을 뿐, 그들이 해야 했던 일의 열악한 상태는 돌연 은폐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부모의 직업이 성공으로 다가가는 자식의 서사에 감동을 주는 소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모의 직업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부모가 아니라 개천의 용이 된 자식이다.


용이 된 자식은 무수한 역경을 이겨내야만 이 서사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 역경의 근원은 무엇인가? 부모가 물려준 가난밖에 없다. 개천용 서사의 힘은 그 가난에서 비롯된다. 가난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난에 발목 잡힌 사람들의 일터는 대개 열악하다. 자식을 위해 헌신한 엄마들이 일하는 곳들처럼.


가난과 직업은 밀접한 관련성을 띨 수밖에 없다. 개천용 서사는 당연하게도 신분상승에 대한 스토리다. 신분상승은 곧 가난의 극복을 의미하며, 직업의 업그레이드로 증명된다. 그래서 21세기 대한민국이 강고한 신분제도 사회인 조선시대냐는 말은 반만 맞다. 선망하는 직업과 괄시받는 직업 사이의 간극이 크더라도 '비교적 자유롭게' 신분의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동의 가능성이야말로 직업의 계급성을 방증한다. 결국 직업의 귀천을 부정하면 개천용 서사는 만들어질 수 없다.


신분상승의 스토리는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도 힘을 준다. '나도 할 수 있다.' 그런 용기가 또 다른 개천용이 되기 위한 존재들의 경쟁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누구나 용이 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졌더라도 집이 가난하지 않으면 개천용 서사는 성립되지 않는다. 여러 제약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얻을 수 있는 그 희소성 덕에 개천용 서사의 환상은 더 거품화된다.


가난해도 노력만 하면 용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직업의 귀천을 고착화한다. 굳이 열악한 일터를 개선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개천의 용만 되면 모든 것이 자연스레 해결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만큼 노력을 해서 얻은 지위와 권한인데 그걸 노력하지 않은 이들이 누리려 한다면 그건 도둑놈 심보나 다름없다. 이런 생각은 직업의 계급성을 굳건하게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일까? 열악한 일터는 한 번쯤 거쳐 가거나 극적인 반전을 주는 스토리 정도로 인식된다.


아름다운 이미지로 포장되는 일터가 사실은 열악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당사자들은 물론 존재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식에게만 헌신하는 '부모'가 아니다. 모두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바꾸려는 '노동자'다. 그들은 자식을 개천의 용으로 키우지 못했다고 침묵해야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싸운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보다 자식들이 청소일을 해도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싸우는 엄마들'의 투쟁 스토리는 잘 소비되지 않는다. 개천을 정비한다는 뻔한 결말보다야 그곳에서 용이 태어난다는 에스에프(SF)적 결말이 훨씬 더 극적인 반전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미없는 스토리에 관심과 흥미를 가질 대중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4일 한날에 말과 글로 각각 개인사와 현시대상을 이야기했다. 먼저, 그는 전북 군산 유세 때 자신을 '비천한 출신'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 단어의 기원은 개인적으로 불우했던 가정환경과 시장 화장실 청소부인 부모의 직업에서 비롯됐을 터다. 이런 와중에 그는 무일푼의 소년 노동자에서 거대 여당의 대선 후보로 '출세'한 개천의 용이 됐다. 다른 대선 후보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이력이므로 자신의 높은 비호감도를 줄일 무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려면 그동안의 역경을 더 부각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세상에 존재함을 '비천한 출신'이란 단어의 조합으로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밑바닥에서 최정상으로 올라서는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편 그는 부모의 자랑거리였을 그가 청소·경비노동자들의 쉴 권리를 보장해주자는 글도 에스엔에스(SNS)에 함께 올렸다. 하지만 그의 '출신성분' 발언만 콕 짚어 비판하는 언론과 여론들 속에 묻히고 말았다. 역시나 대중은 쉴 '권리'보다 비천한 '출신'에 더 관심을 보였다. 개천용 서사의 근원적 요소에 역시나 발 빠르게 반응한 셈이다.


두 이야기는 사실 연결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청소노동자들은 쉴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할 만큼 '비천하게' 일한다. 이 후보의 발언에 반응하는 언론과 여론의 추이대로라면 아무도 청소라는 직업을 비하하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자식이 검사나 판사가 됐다고 홍보하는 펼침막을 본 적은 많지만, 청소노동자가 됐다고 자랑스럽게 현수막을 건 부모는 마주한 적이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면, 청소서비스의 사용자와 소비자들이 그동안 청소일에 매긴 값어치를 한 번 보라.


생애 주기상 고연령층 여성 대부분은 집안일에서 파생된 청소, 돌봄 등의 바깥일에 복무한다. 개천용 서사의 배경이 되는 핵심 요소들이 요즘도 그 일터들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뻔한 클리셰의 창작물이라도 대중에게 사랑받듯, 사람들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쓴 개천의 용들에게 언제나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마다 엄마의 일터는 더 힘들고, 더 더럽고, 더 위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는 여전히 밖에서 '집안일'을 맡은 엄마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원한다. 그 이유는 과연 뭘까? 일터의 비용 절감을 위한 고전적 노무관리시스템 때문일까?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는 모성애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더 감동적인 개천용 서사를 바라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우리가 집안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을 오로지 '헌신적인 엄마들'처럼 소비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 이 글은 2021년 12월 27일, 『한겨레』에 실렸던 「'비천한 출신' 논란이 놓친 것」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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