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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Oct 21. 2022

승자의 독식

과반

지난해 11월부터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소속 13개 대학 사업장(연세대, 고려대 등) 비정규직 노조들은 16개 용역업체들과 임금·단체협약 집단교섭을 진행하였다. 현재는 각 사업장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적법하게 확보한 쟁의권을 행사 중이다. 그런데 이 노조들이 집단교섭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현재 13개 사업장 대다수는 두 개 이상의 노조가 경쟁하는 복수노조 체제가 형성된 상태다. 복수노조 하에서는 교섭창구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노동법(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의 절차대로, 이 과정에 '무조건' 참여해야 사측과 교섭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 그다음에는 대표교섭노조 지위를 얻어야 한다. 이는 다수노조만이 '쟁취'할 수 있는데, 다른 노조보다 단 한 명의 노조원만 더 가입시키면 된다.


결국 13개 사업장의 노조들도 대표교섭노조의 지위를 얻었기에 쟁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쟁의권은 교섭권이 존재할 때야 비로소 성립되는 충분조건이다.


물론 사용자가 소수노조와도 교섭을 하겠다고 한다면 교섭창구단일화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럴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이 제도의 탄생 배경에서 비롯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제도는 사용자가 복수의 노조들과 교섭할 시 발생할 비용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제정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떤 사용자가 소수노조와도 교섭을 하려 할까?


오히려 사측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노조'를 소수노조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다. 반대로 말하면, 회사의 경영방식에 잘 따를 만한 노조를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다수노조로 만들려는 것이다. 사용자가 이 노조를 방패막이 삼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노조'의 요구를 합법적으로 묵살시키기 위함인데, 다수노조만이 교섭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역이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상황이 발생해도, 강행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조'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소수노조로 만드는 것이 사측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연세대 청소노동자들과 같은 산별노조에 속해 있는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 소수노조화됐는데, 이 과정에서 원·하청의 불법 정황이 드러났다. 그 결과에 따라 세브란스병원 사무국장과 용역업체 부사장 등 9명이 지난해 3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기소는 됐지만, 사실 형이 언제 확정될지는 현재로서 기약이 없다. 실형을 받을지, 벌금형을 받을지조차 모른다. 아예 무죄가 나올 수도 있다.


소수화되는 과정에서 불법의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은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처럼 시급 400원 인상과 샤워실 설치 등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교섭을 시도하려 해도 할 수 없다. 사측이 역설적이게도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철저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과정이 어떻든 현재의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같은 학교법인 내에 속해 있으면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의 현실은 교섭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 그래서일까?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은 연세대 청소노동자들과 달리, 사측에게 '교섭에 응하라'는 천막농성을 200일 넘게 하고 있다.


서울의 또 다른 곳에서는 민주노총(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지회) 소속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이 단식농성 중이다. 그 이유는 쉴 권리 등을 보장받기 위해서지만, 더 본질적인 사유는 '사측과 마주앉기' 위해서다. 이 사업장에서 민주노총은 소수노조다. 당연히 사측은 교섭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서울지부 소속 한 소수노조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소수노조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옛날에 다수였을 땐 느끼지 못한 감정이에요. 회사가 교섭을 거부하는 건 합당한 거고, 우리가 교섭을 요구하려고 사무실에 찾아가는 건 불법이래요. 그래서 업무방해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어요. 경찰에도 갔었고, 검찰에도 갔었어요. 그러니 뭘 하겠어요? 합법이라는데. 그게 합법이면 우리가 거기에 맞서는 건 자연스럽게 불법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사실 간신히 버티는 것뿐이에요. 노조원 수가 적다고 차별적인 대우도 많이 당해요. 회사랑 교섭조차 못하고 차별만 당하는데, 그런 노조에 누가 가입하고, 누가 남아 있으려 하겠어요? 노조에 애착이 없으면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이제는 노조 탈퇴 못하게 설득하는 것조차 버거워요.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든 끝까지 버티려고 노력 중이에요. 정년을 다 채워서 나가든, 중간에 해고를 당하든, 어쨌든 이곳에서 지금의 노조로 최대한 남아 있는 게 지금으로서는 우리의 최고 목표예요."


노조의 존재 목적이 사용자의 착취를 방기하는 쪽(주로 어용노조의 존재 이유)보다는 '최소화'하는 방향이라면, 가장 합법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소통수단인 교섭권은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노조의 최후 보루인 쟁의권까지 적법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필수적인 권리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용자와의 교섭이 가능한지 여부에 따라 노조의 존폐 문제가 대두될 수도 있다. 교섭권이 없는 노조한테는 사측과 '합법적'으로 맞설 방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사측과 교섭할 권한을 얻으려고 농성까지 해야 한다. 다수가 승자처럼 모든 권리를 독식하는 곳과 소수가 패자처럼 모든 권리를 잃는 곳은 역설적이지만 같다.




 

이 글은 2022년 7월 28오마이뉴스에 실렸던 '합법적'으로 버티는 사측...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와 2022년 6월 20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 그 법을 만든 목적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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