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울이 그녀에게는 따뜻한 기억이라니

감정일기 #우울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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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명사

1.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음. 우울에 잠기다

2. 심리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픔.



'우울'이라는 단어로 글을 쓰라는 숙제를 받았을 때 나는 꽤 오래 생각해야 했다. 떠오르지 않는 우울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사전을 열어 검색을 한다.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음'. 오늘의 나는 우울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혹은 정신을 놓고) 살고 있었다. 숙제를 끝내기 전에는 집으로 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기억해냈다.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23살 고시원의 풍경을 말이다.







내 우울이 그녀에게는 따뜻한 기억이라니.


서른 하고도 3년의 해를 살아오면서 가장 우울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23살의 서울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살아본 서울의 가장 밝고 어두웠던 장면들이 말이다. 내가 다니던 공연 기획사는 내가 인턴으로 들어가고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침잠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시절의 푸릇하던 나에게는 꽤 어렵고도 우울한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인턴의 우울한 기억을 안고 서울에 남아있겠다던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남들은 흔히 말하는 스펙이라는 것을 쌓기 위해 서울의 고시원에서의 삶을 자처했지만 지금에서야 조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사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던 청춘의 골목 끄트머리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꾸역꾸역 서울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 엄마는 매달 공장에서 번 돈의 반을 내 생활비 지원을 위해 보내왔다. 종로 3가에 자리한 유명한 영어학원에 다니며 눈에 보이는 토익점수를 따내는 노력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였다. 325점에서 시작한 점수는 반 년동안 790점이라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점수를 만들어냈지만 지금 돌아보면 유효 기간이 정해진 토익에 청춘을 바친 것이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마는 바이다.








23살, 종로 3가의 낡은 고시원


내 우울의 전신이었던 종로 3가의 낡은 고시원은 1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슴 어딘가를 시큼 거리게 할 만큼 아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 달에 30만 원도 채 안 되는 월세를 내는 방에 많은 기대를 하기 어려울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벌써 몇 명이나 누웠을지 모를 얼룩덜룩한 침대 매트리스도, 세월이 흔적을 남긴 노란 벽지도 오래된 드라마에서 볼 법한 나무 문도 말이다. 하지만 하루 만원으로 잠을 해결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감지덕지하면서 사는 게 맞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서울의 고시원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가기로 했다. 서울이라는 곳은 놀라웠다. 아주 작은 공간까지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낡디 낡은 회색의 건물들이 저마다의 명패를 가진 채 누군가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경이로운 일이었고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 차 있는 고시원이 한 두 곳이 아니라는 것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무튼, 나는 ‘종로 3가’ 지하철역에서는 3분쯤 걸어야 하지만 화려한 불빛들 속에 자리한 그런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중이었다. 지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방과 고깃집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어두운 귀퉁이의 계단으로 몸을 숨기면 그제야 명패를 확인할 수 있는 곳. 그래도 조금의 위안이 되는 사실은 낡은 건물의 외관과는 달리 그곳은 언제나 따뜻했다는 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 가장 먼저 고시원 실장이라 불리는 젊은 남자 (아마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이었을 것이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가 몸을 눕히곤 했다. 4층과 5층이 모두 고시원이었던 곳. 낡을 대로 낡아버린 고시원에서 살던 그 시절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는 건 내 한 몸 뉘일 방문을 열고 들어가 이불을 덮고 나면 그곳은 언제나 온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시원의 풍경


외풍이 심한 고시원의 여자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기 위해 기다린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깨끗하고 아늑한 환경에 사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샤워를 하고 성급히 물기를 닦아내고 나면 온 몸의 털들은 서울에서 살아가는 내 우울처럼 잔뜩 곤두서곤 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몸에 딱 맞는 침대에 누우면 이따금 옆 방에 사는 아버지뻘 되는 이의 통화 소리와 기침 소리가 사람 사는 온기를 남겼고 방 안에 놓인 정사각형의 냉장고가 우울에 젖어있는 나의 정적을 깨고 돌아가곤 했다.


방안에 놓인 유일한 가구였던 침대와 책상은 나무로 된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침대 위로 놓인 책상 아래 발을 넣고 누우면 팔을 뻗어 스위치를 끄고 잠들 수 있는 것이 이 방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굳이 일어나서 불을 끄지 않아도 될 만큼의 방. 그 낡은 스위치를 딸깍하고 내리면 지나칠 정도의 암흑이 찾아왔다. 언젠가부터는 낮에도 밤에도 빛 한 줄기 허용하지 않는 그 방의 어둠이 자꾸만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아서 나는 매일 불을 켜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매일 캔 맥주 하나를 빈 속에 들이부어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불안과 우울의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와 나눈 가장 우울했던 장면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서울로 면접을 보기 위해 상경한 선배 언니가 하루 이틀 신세를 질 수 없겠냐는 연락을 해왔다. 처음엔 조금 난처했지만 연고 하나 없는 서울에서 길 찾는 것조차 어려운 마음을 잘 알기에 고시원 실장님께 몇 번이고 양해를 구하고 종각역에서 언니를 만났다. 면접을 앞두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언니는 죽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또 쓰다듬는 동안 언니의 죽 그릇엔 죽이 오래 남아 있었지만 외로움조차 허기로 느끼고 살던 내 죽 그릇은 빠르게 비어갔다. 그렇게 추운 아스팔트를 걸어 도착한 거무튀튀한 고시원의 부끄럽고도 우울한 침대를 언니와 함께 나누며 쪽잠을 잤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하늘을 보고 눕기엔 너무나도 좁았던 침대. 나는 결국 면접을 앞둔 언니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굳이 노란 장판이 깔린 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그 외로운 공간에서 불을 끄고 잔 몇 안 되는 날이 바로 그 날이었다.


언니는 그 면접에 합격했지만 서울살이를 견디지 못해 부산에서 취업을 했고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호주를 떠돌아다니며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런 우리가 서른이 넘어 강남역 어딘가에서 만난 것은 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가움에 젖어있던 나를 깨운 건 잊고 있던 고시원의 기억을 꺼낸 언니의 말이었다.



“그 시절, 너에게는 너무도 서럽고 힘들었던 기억이겠지만 나는 그 공간이 여전히 너무도 따뜻하게 남아있어. 네가 있어서 나에게는 따뜻했던 서울의 기억이었거든”





충격이었다.


내가 성급히 마침표를 찍었던 우울이 누군가에게 여전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낯선 서울 어딘가, 익숙한 사람이 머물고 있는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우울한 공간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겐 낯선 충격이었다. 나조차도 잊으려 노력했던, 이따금 떠올릴 때마다 목이 메곤 하는 그 공간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여전히 따스한 채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내가 깨달은 것은 나에게 찾아온 감정들에 섣불리 마침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우울했던 감정 역시도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질지도 모를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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