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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니 Apr 27. 2023

4월의 방랑기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사적인 생활과 감정을 거짓없이 공유하고 싶은데 솔직하지 못했거나 솔직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있었고, 누군가와의 추억이나 대화는 둘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기도 해서 sns를 뜸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은 소소한 낙이니까, 언제까지나 방황하며 살 계획인 저의 4월 일상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https://youtu.be/pQ_K9QGCWE0


이것은 요새 가장 많이 듣는 잉인뉴.


그냥 바다에서 들어도 좋았는데 가사를 알고 들으니까 더 좋다. 대중 속에서 이방인과 같이 느껴졌던 많은 순간들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말,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https://youtu.be/sJq2YsoSHk0


그리고 자주 듣는 올드팝.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을 만난 나에게,


keep giving all the love you can.



사케모토 류이치를 추모하며 듣는 곡.


가사있는 곡은 몇 없지만 나는 이 노래가 제일 좋더라. 제 삶의 외로웠던 많은 순간들을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번에 보기 힘들어서 주말 내내 띄엄띄엄 봤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요새는 나의 결핍과 타인의 결핍을 자주 생각해보았는데, 내가 타인의 어떤 모습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는지 생각하면 나의 결핍을 알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지 경청하다보면 타인의 결핍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유치하고 투명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로 정해지는 것이라는 마츠코의 대사를 듣고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이 생각났다.


“당신이 태어날 땐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당신 혼자 미소짓고 모든 사람들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런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저번 주말에 예술의 전당에서 보았던 겹벚꽃.


봄은 가장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사그라드는 계절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해줬는데, 환자들이 봄에 가장 많이 별세한다고 한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아름다운 계절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인가봐.


원래 겨울을 가장 좋아했는데, 요새는 여름이 가장 좋다.

선선한 저녁에 한강이나 집 근처 벤치에서 시원한 캔맥주를 먹는 것도 좋고,

실컷 땀흘리고 들어와서 초저녁에 차가운 물로 샤워하는 것도 좋고,

햇살이 들어오는 오후에 창문을 열어놓고 바람을 즐기며 누워있는 것도 좋고,

장마철에는 가끔 비를 맞기도 하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쓰는 것도 좋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다가 차가운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좋고

바다에서 한참을 놀다 나와서 으슬으슬 떨다가,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허기를 채우는 것도 좋고 그냥 다 좋다.


봄은 충분히 즐겼으니 여름아 어서 와주라!

2023년의 여름아, 나를 더할나위없이 행복하게 해주라!







사람이 많을 줄 알고 간 석촌 호수지만 그래도 정말 사람이 많았다. 원래는 조금 불평했을 나지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떠올라서 ‘사람이 많으니 축제같다’고 생각했다.


벌써 그리운 어느 봄날이었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쉬고 있는 분을 몰래 찍었다.

기록용으로 대충 찍던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어보고,

내가 찍은 사진이지만 정말 아름다워서 - 놀랐다.

앞으로는 사진 한장도 진심으로 찍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을 가기 전 여행을 더 잘 즐기고 싶을 때

또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는 조르바를 읽는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는다.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지금 여기에 행복이 있음을 느끼기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진정한 행복이란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랑하며 사는 것. 크리스마스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 홀로 떨어져 별을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갑자기 인생은 마지막 기적을 이루며 동화가 되어 버렸음을 깨닫는 것.'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략-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이런 식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에 던져버리는 것. 다른 정열,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하기 위해 쏟아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삶이 너무 가벼워도 문제가 있겠으나, 나는 참을 수 없이 가볍고 경쾌하게 살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서 끊임없이 침전하다가 침전하다가 조르바를 읽으면 아! 그것이 인생이었지! 하는 깨달음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일, 삶의 모습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이 하찮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요새 제법 열심히 하는 클라이밍!

사실 운동을 좋아하기 보다는

운동 후에 찾아오는 뿌듯함을 좋아한다.


어떤 성과가 발생했거나 조금 힘들었더라도 무언가를 해내었을 때 수고한 나 자신에게 대가를 지급하는 가혹한 행위를 즐기는데,


클라이밍은 운동의 과정도 흥미로운 별종 운동이다.



평일에 연차쓰고, 친구 픽업해서 인천 앞바다를 보러가는 멋진 어른이 되었다. 을왕리 해수욕장에 갈 때마다 매번 들리는 조개 구이집도 있다. 이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주말에 회사 사람들이랑 등산을 가면 장어를 먹을 수 있다.


다들 꼬리를 안드시길래 새우 꼬리처럼 맛없어서 못드시는 줄 알고 내가 다 먹었다. 아빠한테 산악회 뒷풀이 자리에서 장어 꼬리를 내가 다 먹었다고 하니,

정말 크게 웃으셨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브로콜리와 당근을 주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스페인에 다녀왔습니다.


스페인도 스페인이지만,

같이 갔던 너를 더 잘 알게되고

나를 더 잘 알게되었던 여행이라 좋았어.


앞으로 너를 더 배려하는 내가 되어보겠다고 다짐했어.

여행 중에는 여행에 집중하느라 사진 못올리고

숙소에서는 잠들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대화하다가 사진 못올리고

일상에 돌아왔을 때는 여독때문에 사진 고르다가 맨날 잠들어서 못올리다가


야근하고 퇴근길에 집에 오면서 업로드한, 너의 예쁜 시선들.




스페인에서 사온 와인도 어서 마셔보고 싶다.

한국에서 산 와인이나 맥주 등은 내가 맨날 글쓰면서 홀짝 홀짝 다 마시지만 스페인에서 구해온 친구들은 꾹 참고 안먹고 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람과 먹고 그 와인을 기억하고 싶어서.

또 언젠가 그런 특별한 날이 오면, 그 와인을 찾아먹고 싶어서.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서 설렘을 안고 기다리면, 기다리는 시간도 약속 시간의 일부가 된다.




인간의 초월과 창조를 향한 욕망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란 자신이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강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욕망이며, 그렇게 강하고 고귀한 인간으로 자신을 육성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초월과 창조를 향한 욕망은 많은 경우 비이성적이고 병적으로 실현된다. 즉,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망 혹은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가장 병적이고 비열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경우는 자신보다 약한 인간들을 따돌리고 괴롭히거나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는 형태로 나타날 때이다.


   그러한 욕망이 이성적이고 건강한 방식으로 실현될 경우, 그것은 다른 인간들이나 사물들을 자신의 생존이나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실현하도록 돕는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자신이 그렇게 타인을 도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은 상대방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움을 니체는 우정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얼마나 병적이고 비열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인지조차 못한다는 것이 문제 아닌가?

조악한 삶을 살지 않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4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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