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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 외계인 Mar 28. 2024

나의 돌봄 노동 해방 일지

케어러 예찬

살짝 과장하면, 반 송장 상태로 멜번으로 유입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철밥통인 공무원, 그 중에서도 교사란 직업을 “과감하게”관두고 멜번으로 이민 온 나를 별나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과감”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교사란 직업을 수행하면서 건강을 심하게 잃었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었다. 아마 한국에 눌러 살았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한국에서 일하다 가는 “죽을 거” 같아서 이민 온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다시 나의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냥 숨을 붙들고 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감사하게도 호주의 청정한 자연과 여유롭고 느슨한 사회 문화가 나를 치유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게으르고, 느려 터지고, 더 나아가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호주의 시스템과 문화가 나를 다시 일터로 나갈 힘을 주었다.


케어러란 직업을 예찬한다.

세상에 이보다 나에게 더 잘 맞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돌봄 노동을 시작하기 전에 내 주된 일과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혼자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이 낙도 일 이년 지나니 싫증이 났다. 인간이 이유 없이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란 걸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다.


“할머니, 커피 드실래요, 아님 핫초콜렛 드실래요?”


이젠 혼자가 아니라 고객과 카페에 간다. 내 가장 오래 된 단골 고객 D는 78세 할머니이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단골 카페에 모시고 가서 점심 식사를 지원하는 게 내 역할이다. 할머니는 내가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두 팔을 벌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는 이렇게 환대하신다.


“Oh, my friend!”


내가 지원을 못 간 다음 날엔 어김없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I missed you so much!”


아이처럼 순수하신 어르신이 진심으로 쏟아내는 환대가 나를 따뜻하게 한다.


“할머니, 두나 커버(Doona covers)가 뭐예요?”


84세 할머니 고객 D. 그녀는 유독 침대 정리에 까다롭다. 침대 보와 시트가 정확하게 각도와 방향을 맞춰야 하고 팽팽하게 당겨져서 주름없이 쬐악 펴져야 한다. 마치 호텔식 침대처럼. 그녀에게서는 호주 로컬들의 리얼한 집안 문화를 배운다. 호주에 살아도 호주 로컬들의 집안 문화는 직접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들이 아침으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침실을 어떻게 관리하고,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포리지(porridge)는 뭐고, 샤워할 때 한국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생 자체가 호기심덩어리인 나, 이 일을 하면서 저절로 답을 알게 되었다. 고로 호주 이민 생활에 자신감이 커진다.


“오늘은 크리미 치킨 파스타 만들 거야.”


44세 시각을 거의 상실한 지적 장애인 B. 난 그가 냄비 가득 치킨 파스타를 만드는 일을 곁에서 지원한다. 세상에 내가 젤 좋아하는 일이 요리인데, 누군가의 요리를 도와주고 돈을 받는 직업이라니.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거기다 그는 묻는다.


“다음에 보체(Bocce) 클럽 갈 때 너의 지원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갈래?”


B는 장애인 보체 선수다. 호주의 다른 주에 가서 받아 온 메달을 보여주는 그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B와 함께 보체 클럽에 가고 싶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는 경기인데 실제로 보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나?


케어러란 직업의 매력을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장점이라면, 정해진 근무 시간 외의 책임과 책무와 스트레스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가령, 세 시간 지원이라면, 딱 세 시간만 바짝 집중해서 일하고 나면 끝이다. 지원을 위해 딱히 준비할 것도 없다. 내 몸이 자원이고 내 몸이 지원 도구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한국에서의 교사와 호주에서의 케어러란 직업을 비교해 달라면 난 일초의 망설임없이 답한다.


“난 멜번의 케어러가 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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