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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Nov 26. 2020

딱, 한 꼬집만큼의 후회

  한번 내린 선택을 물릴 수 있게 보장해주는 소비자보호법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온라인으로 주문 한, 화면에서 볼 땐 예뻤는데 막상 입으니 영 벙벙해 보이는 코트를 벗으며 안도했다. 반품 배송비가 아깝기는 해도 직접 매장에 가느라 드는 차비를 생각하면 그게 그거라고 위안 삼으며 인터넷 주문창에 들어가 환불 처리를  했다. 다행히 옷은 무사히 반품되어 배송비를 제외한 돈을 돌려받았고, 내가 한 주문은 '없던 일'이 되었다. 


  '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환불 정책이 우리 인생에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반품하고 싶은 선택이 많은 나는 생각했다. 인생의 모든 선택을 7일 안에 물릴 수 있다면? 아니. 시간제한 없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지금은 더없이 완벽할 텐데!


 사실, 이런 류의 상상은 해봤자 정신 건강에 딱히 좋을 게 없는 게 '더없이 완벽했을' 현재에 대한 상상은 그에 비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진짜 내 모습을 김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초라함을 입증할 객관적인 조건까지 하나, 둘 떠오르면 대망의 '후회'가 복병이 되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게. 더 열심히 살지 그랬어.'  

 '그때는 그렇게 했어야지.'

 '그 말은 하지 말 걸.'


 죽은 후 다시 살아나 산 사람을 공격하는 좀비처럼. 후회는 이미 묻힌 과거의 일로 현재의 삶을 공격한다.



 물론, 모든 후회가 끔찍한 심리적 변종인 것만은 아니다. 가벼운 한숨 한 번으로 잊을 수 있는 후회도 있고,  '경험이 싸는 똥'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후회도 있다. 닥쳐오는 상황을 잡식하는 경험이 걸러낼 것과 가지고 갈 것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내보내는 배설물로서의 후회는 우리 삶의 거름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누리고 있는 문명의 대부분은 오랜 역사의 후회가 쌓여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이룩해낸 성과이니 말이다. 


 문제는 현재의 내가 후회의 공격을 단단하게 방어할 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때 일어난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므로 현재가 아프면 과거도 아파 보인다. 현 상황이 만족스러우면 옛 기억도 훈훈하게 뽀샵 처리되지만 반대의 경우, 기억은 교묘하게 안 좋은 부분만 끄집어내는 악마의 편집을 당한다. 괴로운 현재에 연결된 과거의 선택이 눈엣가시처럼 두드러지게 미운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릴 약은 있어도 과거를 되살릴 약은 없다. '화성을 제2의 지구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실현되기까지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고 난관이 무지하게 많아 보이기는 해도, 어쨌든 미래를 전제로 한 다짐이라는 점에서 1프로의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반면, 흘러간 세월을 돌이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과거에 붙잡힌 사고방식은 화성을 지구로 만들겠다는 포부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후회는 이미 받은 시간을 다 써놓고 반품 처리해달라고 떼쓰는 진상 고객이요, 진상 고객의 떼를 받아내는 점원 역시 나라는 점에서 헤어 나올 길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덫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종종 후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떨 땐 후회에 빠져 심리적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후회할만한 짓을 한 스스로를 벌하기도 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내리는 벌이랄까. 원망의 대상을 나 자신으로 하는데 잘못을 되돌릴 길은 없고, 결국 스스로를 용서할 길이 없게 만드는 폐쇄회로에 갇히고 만다.

 

 과거에 갇힌 내가 또 한 번 현재의 나를 돌보지 않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따져보면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건 애초에 다른 체급을 같은 경기에서 맞붙게 하는, 불공정한 평가 방식일 수밖에 없다. 지난날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생생하게 부딪혔던 어려움이 사라진 지금의 감각으로 그때를 평가하는 건 시간 감각에 혼선이 온 한 발짝 늦은 다짐일 뿐이니 말이다. (과거로 갈수만 있다면 하버드에 합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런 식으로 열리기도 한다.)


 만약 내가 지금의 나에게는 관대하고 과거의 나에게는 냉혹하다면 미래에 돌아보는 오늘의 내 모습 역시 또 다른 후회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공을 넣을 기회는 후반전에도 있다. 
과거의 나에게는 관대하고 현재의 나에게는 냉정할 때.
남은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불길에서 목숨 바쳐 생명을 구한 소방관에게
왜 식탁 위에 있던 스마트폰은 안 가져왔냐고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무례한 태도로 종종 스스로를 대하고는 한다. 


 후회의 다른 이름은 어쩌면 욕심인지도 모른다. 오늘날까지 버텨온 나를 무시한 채 그보다 나은 나를, 모든 걸 다 완벽하게 가지려는 욕심 말이다. 현재의 우리는 모두 각자의 불길 속에서 이날까지 버텨온 사람들이다. 살아남기도 바쁜 와중에 모든 걸 다 완벽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오늘의 나는 살아남은 것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해낸 대단한 나이다. 후회하며 다그치기 전에 수고한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게 나에 대한 도리다.


 뭐든 경험해 봐야 폭넓어지는 것처럼. 나란 사람을 경험하며 갖게 되는 안목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우리는 후회를 잘 활용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후회는 나를 더 감칠맛 나게 돋아주는 후추와도 같다. 후추를 살짝만 뿌려야 하는 요리에 끊임없이 털어 넣으면 못 먹는 음식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후회도 딱 한 꼬집만큼만 집어넣어야 간이 맞다. 그러니 적당히 후회하고 닫을 줄 아는 게 공들여 만든 요리에 대한 센스 있는 마침표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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