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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Jan 21. 2022

서울을 떠나 어디를 갈까

 노을을 끝으로 휘발되어 가는 하루의 끝자락이었다. 엊그제 주유해 놓은 기름은 낮 동안의 흐름을 따라 소멸하는 중이었고, 오늘 하루의 일부도 어딘가 내가 모르는 세계로 증발되어 가는 분위기의 오후였다. 


 낭만적인 시간대였다. 강변북로로 몰려들기 시작한 퇴근길 차들만 좀 덜했다면 이국 해변의 선셋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고 여유롭게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대의 노을은 도시의 황량함을 채색하는 아름다운 자연현상임과 동시에 불길한 정체의 예감이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가다 서다 장단 맞추기를 반복하다 보니 창밖의 노을은 저문 지 오래였고 집에 돌아가지 못한 차들은 길 위에서 향수병을 앓고 있었다. 차 안에서 휘발되어가는 우리의 저녁과 인생에 대해 성토하는 곡소리가 중저음의 엔진으로 울려 퍼지는 밤이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나 모두의 탓이기도 한 모순이, 자발적이라고도 비자발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결집이, 사람이 모여 사는 꼴이 징글징글하다 싶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의 얽힘은 때론 정이 되고 때론 소소한 짜증으로 시작해 광기 어린 히스테리로 폭증하기도 한다.


‘왜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


 퇴근길 정체에 갇혀 고문 비슷한 걸 당할 때마다 자책하듯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전철과 도로가 잘 갖추어져 있지만 그 잘 갖추어진 교통의 편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과도하게 몰리는 바람에 삼십 분이면 갈 거리를 세배쯤 걸려서 이동해야 하는 비효율의 난장. 도시인들의 옅은 정신병을 유발하는 집단적인 소모전.


 사람 많은 걸 질색해 휴가철 성수기는 반드시 피하면서도 일 년 내내 성수기처럼 붐비는 여기는 왜 떠나지 못하는 걸까. 도시가 붐비는 건 원래 그런 거라 여겨 용서되지만 한적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바다와 산이 붐비는 건 못 참아서인가.




 살던 곳의 혼잡과 소음에 길이 들어 미운 정이 맷집처럼 쌓인 건가. 떠나고 싶은 이유가 열 가지라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두세 가지뿐인데 그 두세 가지가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해서일까. 일과 사람과 물건. 어쩌다 보니 인생을 구성하는 삼등분이 다 서울에 있으니 여기를 떠나 어디를 갈까.


 한적함에 녹아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귀농이나 귀촌이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서울을 떠나 어디를 가보아도 내 자리를 찾았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작은 소도시에 깔린 고즈넉한 여유로 충전을 얻으면 이내 그 힘을 발산할 무대가 그리워졌고 북적대는 활기 속으로 다이빙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내심 돌아갈 자리가 도시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건 오랜 서울살이의 고질병인 듯했다. 계절이 계절답게 물든 풍경과 진짜 공기 같은 공기를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게 여행의 끝자락을 대하는 내 태도였다.


 서울의 부재는 서울의 존재를 부각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붐비는 서울역에 내리면 미리 준비되어 있던 혼잡이 기다렸던 것 마냥 격하게 반겨왔다. 실은 늘 그래 왔던 공간에 나 하나 추가된 일일 뿐이나 내게는 서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환영하는 나름의 제스처처럼 느껴졌다. 서울에는 그런 류의 무심한 반김이 있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는 거리의 일관된 무관심에 길들여지면 차츰 삭막한 공기 뒤에 어린 친근함과 아는 체할 수 있었다. 일단 그렇게 되면 모르는 이들로만 구성된 넓은 서울역 광장을 통과해도 딱히 외롭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시골의 인심보다 후한 무관심이었다. 


 다양한 것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어 특정 대상을 지목해 제거할 수 없는 절체 불명의 소음과 냄새 사이를 쉼 없이 걸어 다녔다. 여행지에서 풀고 온 피로는 빠르게 평소의 표준치를 회복했다. 익숙해서 괜찮고 견딜만한 힘듬이었다. 집에 와 벗어 놓은 점퍼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고 그냥 사는 사람만 아는 도시의 이야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길가의 먼지와 시멘트의 기운과 포장마차의 오뎅 퍼지는 냄새와 옅은 니코틴. 서울의 향을 담아 디퓨저를 만든다면 아무도 방 안에 들이지 않겠지만 코트에 배인 정도는 싫지 않아 내버려 뒀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는 걸 알게 해주는 냄새, 안도감을 주는 냄새가 묘하게 반가워 옷걸이에 잘 걸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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