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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Feb 04. 2022

해치우지 말고 그냥 먹자

 일주일 전부터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로제 떡볶이를 그냥 먹어버리기로 한 날이었다. 일주일간의 고민이 무색하리만치 빠르게 배달된 떡볶이는 크고 깊은 일회용 플라스틱 냄비에 가득 담겨 있었다. 오뎅사리와 중국 당면을 추가한 결과였다. 끈적하게 녹은 모짜렐라 치즈 밑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탄수화물이 다양한 형태로 혼합되어 있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위축될 만큼의 양이었다. 어쩐지 식욕이 아니라 승부욕이 샘솟는 기분이었으나 몇 젓가락 못 가서 무자비한 탄수화물의 포만감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먹고 싶다! 로제 떡볶이!'에서 '이 많은 걸 언제 다 먹냐'로 포커스가 옮겨가자 갑자기 떡볶이 맛이 덜해졌다. 아까웠다. 일주일 전부터 먹고 싶었던 떡볶이를 드디어 먹게 됐는데 막상 입에 넣게 된 순간 집중력을 잃었다는 게. 억울했다. 먹고 싶어서 안달 났던 요리가 어느새 먹어 ‘치워야’할 짐이 되었다는 게. 


 배도 찼겠다, 맛도 생각보다 덜하겠다. 이제는 그만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였다. 남은 건 냉장고에 뒀다가 다음 끼니로 먹으면 되었다. 주문 전부터 착실히 세워 놨던 계획이었다. 예상보다 배가 빨리 불러오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냉장고가 있었다. 남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해주는 현대인의 보물창고. 먹거리를 발견하면 앉은자리에서 먹어치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시시대의 습성으로 변명하기에는 너무 아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새로운 종으로 거듭나야 할 때가 아닌가. 발달된 문명에 우아하게 적응해야 하지 않을까. 냉장고가 보급된지도 오래된 마당에.


 그러나 젓가락을 내려놓는 일은 천하의 권력을 내려놓는 일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입으로는 떡을 우물거리면서도 눈으로는 떡볶이를 노려보는 나였다. 식사가 과식의 단계에 진입할 때 형성되는 버티기 기운이 식탁 위에 짙은 전운을 드리웠다.




 어려서부터 ‘밥 남기면 벌 받는다’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었다. 접시에 음식이 남겨진 꼴은 나도 모르게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기아 상태나 윗세대의 보릿고개와 연결되고는 했다. 그들의 가난과 서러움을 외면할 셈이냐고, 엄마한테 들었던 주입이 식탁 밑의 잠재의식이 되었다. 여기에는 타고난 식탐도 한 몫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싹싹 뒷받침해주는 식성이 없었더라면  엄마가 아무리 죄책감으로 조련하려고 해도 잘 안 먹혔을 것이다. 덕분에 키는 많이 컸지만 '소식이 미덕이고, 남기는 게 남는 거'라고 바뀐 생각을 습관이 따라가지 못해 애먹는 어른이 되었다. 


 "먹어 치워 버리자"라는 말을 싫어하면서도 늘 먹어 치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된 것도 아이러니다. ‘치운다’는 말은 쓰레기를 치울 때도 쓰는 말이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동사를 먹는 일에도 똑같이 쓰는 언어 선택은 음식을 끼니를 때우는 식량으로만 보거나 식량 이하의 것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거부감이 들고는 한다. 남기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느라 먹는 순간의 기쁨을 걱정으로 희석시키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밥을 해치운다. 직접적으로 ‘치운다’는 말은 쓰지 않지만 밥을 먹는 태도나 속도는 ‘치움’으로 봐도 무방하다. 멀쩡한 먹거리가 버려지는 사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을 낭비할까 봐 걱정하는 성급함이 젓가락질의 속도를 높인다. 앞에 놓인 끼니를 다음 스케줄에 대한 방해꾼 정도로 여기는 마음. 일을 위한 연료,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시각.


 그거 다 옛날식 마인드라고, 요새 필요한 생산성은 그 생산성이 아니라고, 유러피언적인 여유까지는 무리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기본 도리는 지키자고.  ‘해치우지’ 말고 ‘그냥 먹자’고 다짐해야 가까스로 조급함을 인지하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렇게 애써서 여유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웰빙이나 워라벨에 대한 또 다른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급하고 성마르게 살던 사람이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해보려고 한다. 밥을 하대하다 보면 무의식 중에 나를 하대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외부의 먹거리일지라도 일단 내 안에 들어오면 나의 일부가 되는 밥. 그걸 대충, 빨리 해치우려는 마음은 어느덧 밥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더 생각하는 마음으로 번지기 쉽다. 알레그로까지는 무리라도 스타카토는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 해치우지 말고 그냥 먹자. 


 식사 전에 나를 달래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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