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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Apr 07. 2022

겨울이 레이트 체크아웃한 바람에 뒤늦게 온 봄에 대해

 겨울바람에 맞춰 두껍게 봉제해 놓은 천이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았다. 반쯤 차오른 마음의 봄이 미식미식 일렁이고 있었다. 몇 발짝 앞서 내놓는 쇼핑몰의 밝고 하늘거리는 옷만 눈에 들어오고 화장대 한쪽에 내버려 둔 시트러스 계열 향수에 자꾸만 눈이 갔다. 눈은 가는데 손은 못 갔다. 문밖을 나서면 여전히 바람이 찼다. 솜을 적당히 넣은 경량 패딩이 봄이라 믿었던 3월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는 옷차림이었다.


 시각으로 들어오는 정보와 평형감각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달라, 두 개의 정보가 충돌해 뇌에서 발생하는 혼선을 '멀미'라고 한다.


 아마 3월 말의 내가 앓았던 답답함은
 '멀미'였을 것이다.
가지 않는 겨울에 대한 지겨움,
오지 않는 봄에 대한 그리움이
 겹친 봄멀미였을 것이다.

 멀미의 장점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이다. 4월이 되자 비어 있던 마음의 절반이 만개한 개나리와 철쭉과 유채꽃으로 메워졌다. 기다리다 지친 마음에 맺힌 멍울쯤은 꽃이 필 때 같이 터져 버렸다.



 봄은 고대했던 <브리저튼>의 속편처럼 왔다. 브리저튼 가문의 장남, 앤서니의 사랑 이야기가 끝날 때쯤 창밖의 햇살이 달라져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봄이고 앞산에 핀 개나리도 봄이었다. 사방천지가 봄이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조우하고 싶었다. 레이트 체크아웃하는 겨울과 얼리 체크인하는 여름 사이에 낀 봄을 이대로 스치듯 보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이 나는 주말을 노려 #이천 산수유 마을에 네비를 찍고 차를 몰았다.

 고즈넉하게 바라보았다면 그림 같았을 시골 마을이었다. 이런 그림을 놓칠 사람들이 아니었다. 산수유 마을은 몰려든 인파로 가득했다. 첫눈에 반한 상대와 사람 많은 고속터미널 상가 식당에서 소개팅하는 느낌이랄까. 좀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분위기가 안 받쳐주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주변과 조화롭기보다는 일단 혼자라도 튀어보자는 의지가 결연한 컬러감의 현수막에는 '전원주택 분양 상담 환영' 문구가 주책없이 나부끼고 있었고, 길가 한 켠에는 원기회복에 그르케 좋다는 산수유액 판촉장이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보고자 한 것들은 아니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그쪽으로는 사람이 몰리지 않았다.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 같은 걸 찍는 사람도 없었다. 시선을 강탈하는 현수막과 판촉장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곳곳에 핀 산수유나무만 죽어라 바라보며 지키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 봄의 낭만일 것이었다.

 사실 이래저래 불평할 입장은 못되었다. 관광객은 어디까지나 이 마을의 소란스러운 불청객에 불과했다. 산수유 마을은 애초에 전시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사는 공간으로서의 '마을'이었다.

 수백 명의 무리가 지나가거나 말거나. 길가 바로 옆에 자리한 텃밭 한편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밭을 일구어 오신 듯한 할머니 한 분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셨을 법한 동작으로 파를 뽑고 계셨다. 그 분과 파밭의 관계는 굳건한 역사여서 한철 훑고 가는 방문객들의 가벼운 발걸음으로는 흔들릴 여지가 없어 보였다. 널다란 밀집모자와 목장갑, 꽃무늬 몸빼바지, 소쿠리에 쌓여가는 흙 묻은 파와 그걸 밭 위에서 즉석으로 다듬는 할머니의 손놀림.

꾸밈없는 시골 풍경에 반한 관광객들이 의도치 않게 할머니를 대상화하며 바라보게 되지만 대상화가 되든 말든 개념치 않고 파에만 전념하는 할머니. 너무나도 쿨한 'K-할머니'의 저력이 파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할머니들조차 바라보고 있으면 존경스러우면서도 뭉클해지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는 원리와 관련된 마음의 일일 거라 짐작하며 햇빛 내리쬐는 파밭을 스쳐 지나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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