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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Aug 31. 2018

권태기의 시간

 가까운 대상은 뚜렷하고 멀리 있는 대상은 흐릿한 상태. 난시.    

 가까운 대상보다 멀리 있는 대상이 잘 보이는 상태. 원시.     


 눈앞의 연인만 보이던, 사랑의 초창기 시절은 난시에 시달리는 환자 같았다. 초점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바람에 다른 존재들은 다소 흐릿해져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심리적인 시력 저하 상태.     


그러다가도 언젠가는 겨울이 오는 것처럼. 같은 자리에서 몇 개월 격차를 두고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곁의 연인보다 멀리 있는 누군가가 차츰 눈에 들어오는 시력의 역전은 팔을 덮는 소매 길이가 그렇듯 차츰 다른 거리감으로 바뀌어 어느 순간 차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기도 한다. 누구도 아이스커피를 주문하지 않는. 한파주의보가 내린 어느 카페의 한구석으로. 작동을 멈춘 에어컨 밑으로. 함께 있는 온도가 에어컨으로 식혀야 하는 열기가 아니라는 깨달음. 그다음의 순간으로.     

 눈을 떠보면 먹다 남은 치킨을 데워먹는 눅눅한 아침의 식탁이다. 사랑을 속삭일 때 느꼈던 완전하고 충만한 감정이 식어버린 치킨처럼 눅눅해졌을 때. 마지막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은 팍팍한 부위를 씹어 삼킬 때처럼.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어제의 바삭함을 회복하기 어려운 닭가슴살을 먹어치우듯이 이 사랑은 대체 뭔가 곱씹어 봐야 하는, 식탐을 철학하는 시간.    


 치킨은 치킨으로 와서 제 몫을 끝내고 떠난다. 끝이 왔을 때. 남은 뼈다귀는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정도로 깔끔하게 끝낼 수 있다면. 화석이 될 리 없는 뼈다귀를 땅에 묻고는 언젠가의 발굴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재계발을 막는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사랑은 치킨 한 마리를 주문하는 기분으로 시작할 수는 있어도 그 뒤처리까지 같을 수는 없다. 가볍게 시작한 만남은 있어도 가볍게 끝나는 이별은 없다. 살이 찔 때의 자연증가와 뺄 때의 노력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에게. 서로에게. 기대했던 것들. 환상과 착각으로 찌운 살을 빼는 시기는 오기 마련이고 권태기를 지나는 연인들은 다이어트를 통해 필요 이상으로 부풀었던 감정을 덜어내게 된다.     


 권태기는 허공에 떠 있던 연인들의 발이 땅 위에 착지하면서, 현실적인 시간 감각 속에서 사람이 늙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레 사랑이 늙어가는 과정이다. 죽는다 한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살해한 것이 아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는 모양새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죽음의 원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고 양쪽 다 아닐 수 있는. 사인이 불분명한 죽음을 떠안고 살아가는 공존이다.   

 

 변명처럼. 오래된 연인들의 미덕을 셈해 본다.     


 생각해 보면 사랑의 시작 단계라 해서 모든 게 완벽했던 건 아니었다. 둘 다 서로에게 어설퍼서 커플에게 부여되는 정석을 눈치로 흉내 내며 데이트 코스를 쫓아다니던, 서로에 대한 초보자였다. 커플이라면 마땅히 영화를 봐야 하니까 티켓을 예매하고 데이트 추천 코스를 검색해 쫓아다녀야 한다는 압박감에 무리를 해 돈을 쓰기도 했던. 서로에 대한 이해보다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채우기 바빴던 시절.     

 때론 무리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하던 때의 서스펜스와 두 사람 간의 아무것도 약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불안감마저. 아는 거라고는 그의 장점과 장점처럼 보이는 단점뿐이던. 현실에 대한 무지가 사랑의 무기였던 시절. 상처받지 않은 영혼답게 순진무구하게 행복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을 맞바꿔 돌아가고 싶은 정도의 그리움은 아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이미 꽤 많은 힘을 써서 그때로 돌아가 다시 그 힘을 반복해서 쓸 만큼의 여력은 남아 있지 않다. 서로가 아니고서는 풀 수 없는 1번의 문제와 1번의 답이 되기까지.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추억으로 남겨두고 가끔 꺼내보는 것으로 족한 것들이 있어 삶은 나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허락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마음을 다스리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저 멀리 어디선가 제어하기 힘든 정도의 설렘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은 머리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 마음 가는 대로 둬야 할까. 우리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때가 돼서 내 마음이 어떤 일을 꾸밀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머리는 이미 답을 내려놓았다. 단 한 번의 끈질긴 사랑이 가르쳐 준 교훈이 있다면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한 현실적인 무게감이라는 것. 그러니 언젠가 내 짝이 아닌 누군가에게 설렘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저 폐허가 된 집터에서 모나지 않게 파도로 다듬어진 듯한. 바닷가에나 있을 법한 둥근돌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 되어 혼자 속닥거리며 들뜨고는 다시 가만히 내려놓는 정도로 만족하고 말 것 같다. 이런 거 집에 가져가 봤자 짐만 되지, 하면서.    

 

 썩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또 다른 생명체가 자라는 것처럼 설렘으로 먹고살던 사랑의 1차 시기가 죽고 나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거나 관계 자체가 죽어버리거나. 그냥 죽어 버리고 말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설렘을 찾아 나설 수도 있지만. 사람이든. 일이든. 인생이든. 그 대상이 주는 지루함을 견디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문에 사랑의 권태기가 찾아오는 과정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을 수 있지만 그 시기를 처리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을 수 있다. 치킨을 먹는 방식이야 누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 뒤처리는 깔끔하게 분리수거야 해줘야 하는 것처럼. 지저분한 뼈다귀만 남기고 떠나는 사람의 행동에는 분명 죄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뼈다귀와 함께 버려두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물어야 할 죄가 있는 법이다.     


설렘은 관계를 시작하게 하는 미끼고, 권태기는 이별을 위한 미끼다. 미끼만 주워 먹으면 자생적으로 살아갈 힘은 기를 수 없게 된다.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고 그만두게 만드는 감정으로부터 독립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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