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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01. 2016

감정 부스러기

욕심이 내 감정을 집어삼켰다.


요즘 나는 다시 오지않을 것 같은 여유로운 시간들을 누리고 있다. 지금 내 나이 또래라면 매일 아침 자신의 자리가 있는 회사로 출근을 하거나 하반기 채용이 마무리 되어간다는 사실에 조급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보통의 일상일 터. 나는, 다시 말해 백수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나를 표현할 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들을 앞두고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정규직 전환을 포기하는 것에 후회는 없을까? 아무런 강제 없이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무얼하며 지내야 이 시간의 끝에서 웃는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숱한 고민들을 뒤로 한채, 목표는 심플하게 잡기로 했다.

건강하게 세끼를 챙겨먹어 건강한 몸을 가꾸고 건강한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채워야겠다, 마음 먹었다. 정말 그뿐이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먼저 엄마아빠가 떠난 집의 구석구석을 내 살림살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집청소를 계획했다. 어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구경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집으로 만들고 싶었다. 가장 먼저 부엌을 향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음식들을 냉장고에서 비워냈다. 매일 먹을만큼만, 내가 만들어 해치울 수 있을 만큼만 사서 채워넣었다. 쓰지 않는 그릇들을 끄집어 내 버릴 것들을 나누고 먼지 묻은 그릇들은 씻어 건조대에 두었다. 더디지만 조금씩 내 생활에 맞추어 바꾸어 갔다.


부모님께 더이상 손을 벌리면 철없는 딸이 될 것만 같아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시작했다. 엄마아빠의 어깨를 한껏 추켜세워줄만한 취업소식은 들려주지 못할지라도 걱정거리가 되는 딸이 되기는 싫었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 꼭 필요했다. 다양한 통로로 매일 두시간 마다 아르바이트 공고를 확인했다.


늦잠을 잔 날에는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좀처럼 구해지지 않는 알바에도 조급해하지 않으려, 건강한 생각들을 잃지 않으려. 복잡한 마음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누군가 나의 근황에 대해 물어보면

"응, 이제 조급해하진 않아. 걱정도 별로 없구. 그냥 이 시간들을 잘 쓰고 싶어" 라고 멋지게 대답했다.






그날 만나기로 한 남자친구는 평소보다 일을 일찍 마칠 것 같다고 말했고 평소보다 더 일찍 볼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그를 만나게 된 시간은 평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저 멀리서 그의 모습을 보았고 이내 이상한 감정들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당황스러웠다. 남자친구가 늦어서? 내가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었나? 다가오는 남자친구를 향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런 내 모습에 남자친구는 당황했고 나는 그 이유를 좀처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서러웠던가.

고요한 가운데 내가 애써 지나치려 한 내 감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나는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간들을 결코 걱정과 불안들로 채우지 않겠다는 욕심에 내 감정들을 채 돌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걱정한다는 사실을,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결국 나는 이런 사람'에 그칠 것 같다는 조급함이, 결코 그런 사람에 멈추지 않겠다는 욕심이 내 감정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채 소화되지 못한 감정 부스러기들이 더 크게 울어버렸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보면 기쁨이는 슬픔이가 있을 작은 원을 만들어 놓는다. 라일리의 감정을 슬픔이가 만지지 못하도록. 슬픔이라는 감정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라일리의 마음에 슬픔이 없어지자 오히려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이어지고 우려할만한 일들이 벌어진다. 


슬픔이라는 감정뿐만 아니라 불안, 조급함, 우리가 힘들다고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외면한다고 평온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성장한다는 건 내 감정들을 하나하나 돌볼 줄 알게 되는 것. 그런게 아닐까, 지난 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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