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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Feb 19. 2024

눈이 녹으면 봄이 와요

타인의 불행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된다

   눈이 펑펑 내리던 1월의 어느 날, 하늘이 깜깜한 저녁 여섯 시쯤 백발의 할아버지가 시장 상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빨간색 패딩을 입고 있었고,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않았으며 계속 "집에 가야 돼, 집에 가야 돼"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 따뜻한 데 잠깐만 계셔. 모시러 온다고 하니까" 


"집에 가야 돼. 집에 가야 돼."


"아니, 이 동네엔 고시원이 없다니까. 우리가 찾아볼 테니까 잠깐만 계셔. 응?"



   할아버지를 부축해 들어온 떡집 사장님은 할아버지에게 나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며 연신 당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떡집 사장님의 말에 따르면 혹한기엔 취약계층에게 난방이 가능한 고시원에 머무를 수 있도록 주민센터에서 안내해 준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근처 고시원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동네가 익숙지 않다 보니 외출했다 돌아가야 할 고시원을 찾지 못하고 시장을 계속 배회하는 걸 본 상인들이 따뜻한 도서관으로 모시고 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시원 이름이나 위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경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차가 꽉 막히는 저녁 시간이라 시장 앞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는 경찰차마저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리고, 불안에 가득 찬 눈빛으로 팔과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는 나도 혹시 무슨 일이 날까 싶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할아버지, 따뜻한 차 한 잔 드릴까요?"



   어렵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들리지 않는 듯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팔과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나도 어색함에 쭈뼛거리고 있던 그때 밖으로 나갔던 떡집 사장님이 다시 들어와 고시원을 찾았으니 가자며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도서관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도서관에서 머무른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였지만 한나절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평소에는 어떤 책임이 주어질까 봐 들어도 못 들은 척, 본 것도 못 본 척하며 몇 번이나 타인의 불행을 방관했던 나도 이 시장에서는 혼자가 아니니 지나치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펑펑 내리던 눈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이 눈이 녹으면 곧 봄이 오겠지. 그때까지 부디 이 겨울이 할아버지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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