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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보람 Feb 24. 2024

변기가 막히면 내 마음도 굳어

 물이 철철 새면 내 마음도 철렁

"저... 남자화장실 변기가 막힌 것 같아요."



   말이라도 해주면 양반이다. 그냥 변기를 막아 놓고 도망가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데. 처음 막혀버린 변기를 마주했을 땐 정말 아득했지만 이것도 몇 번 지나고 나니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속으로 소리를 질러댔지만 요즘은 짧은 탄성을 속으로 삼킬 수 있을 정도의 태연함을 갖춘 사람이 됐다. 그나마 여자화장실은 두 칸이라 한 칸을 못 쓰게 되어도 다른 한 칸을 사용하면 되니 큰 문제는 없다. 소변기 하나와 대변기 하나로 이루어진 남자화장실은 대변기가 막히면 소변과 대변 중 소변만 가능하게 되니 인간의 본능적인 배설 욕구를 전부 해소할 수 없어 해우소로써의 역할에 문제가 생긴다. 



   변기가 막히면 일단 답답하고, 한숨이 푹푹 나온다. 나는 아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막아 놓은 변기를 뚫어뻥으로 팍팍 뚫을 수 있을 만큼 비위가 강하지 않다. 앞으로도 강해지긴 어려울 것 같다. 할 수 없이 화학약품의 도움을 받는다. 물론 이것도 막힌 원인이 두루마리 휴지나 인간의 부산물 일 때만 가능하다. 물티슈나 이물질의 경우는 혼자서 무슨 짓을 해도 해결할 수 없어 결국 전문 업체에 연락해 도움을 받는다. 



   우리 도서관은 낡은 주택의 1층을 내부 인테리어만 리모델링해 사용하고 있다. 여전히 배관은 낡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건물의 2층과 3층은 여러 가정집이 모인 다세대주택이며 2층과 3층에 사는 사람들도 가끔 내려와 여기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며 신기해하는, 내부는 주변과 다소 이질적인 모습이다. 세월의 흔적은 아무리 예쁘게 화장을 해도 쉽게 가릴 수 없는 주름 같은 것이라 곧잘 드러난다. 내가 이곳에 온 2023년 1월 이후로 누수가 벌써 세 차례나 있었고, 앞으로도 새로운 곳에 물이 샐 위험은 언제 존재하며, 내가 다 알지 못할 뿐이다. 



   다른 도서관을 방문할 때도 화장실에 가면 혹시 휴지는 어떻게 처리하라고 쓰여있는지 먼저 확인한다. 또 누군가가 나처럼 문제를 처리하느라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안 되니까. 규모가 큰 도서관은 시설 담당자가 따로 있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리할 예산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처럼 작은 도서관은 모든 일의 해결책은 주먹구구에서 시작해 스스로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한 시점에 다다라야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조금은 빠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낡은 건물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누수이다. 도서관의 첫 누수는 여자화장실 온수기에서 새기 시작했다. 지금껏 살았던 집에서는 누수라곤 구경도 한 적 없어 물이 샌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지만, 청소를 맡아주신 어르신의 도움으로 알게 된 첫 누수는 수채화 물감이 물과 함께 번지듯 오묘한 모양새로 퍼져나갔다. 누수를 확인한 즉시 담당 주무관에게 상황을 알리고 건물주 어르신께서 헐레벌떡 달려오셨다. 시설의 문제는 우리 도서관 담당 공무원과 건물주까지 모두가 개입되어야 하는 꽤나 큰 문제라 예민할 수밖에 없다. 천장에 매립된 온수기에서 누수가 시작되었다는 게 드러나 6월의 따뜻한 어느 날, 온수기를 교체했다. 그 뒤로 아직까지는 별문제 없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름이 다 가기 전 두 번째 누수가 시작되었다.



   태양이 뜨겁던 어느 날, 화장실에 갔다가 급한 일을 모두 해결하고 옷을 추켜 올리는데 천장에서 물방울이 내 머리 위로 투두둑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니 동그란 조명 주변으로 또 옅은 수채화 물감이 원형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멍하니 있다가는 한 번 더 물방울에게 강타당할 것 같아서 후다닥 뛰쳐나와 '이 칸은 누수로 인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써 붙여두고 두 번째 누수가 발생했음을 알렸다. 건물주 어르신이 다시 도서관에 방문해 천장을 열어봤지만 이번에는 원인을 쉽게 알 수 없어 누수 탐지 업체를 불러야 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나가고, 더운 날씨로 인해 무더위 쉼터인 도서관을 찾는 방문자 수도 늘고, 화장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다행히 누수가 윗 집 화장실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혀져 건물주 어르신이 조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았고, 써붙여 둔 문구도 뗄 수 있었다.



   그렇게 2023년은 두 번의 누수 사건, 그리고 무수한 변기 막힘과 함께 조용히 흘러가는 듯했으나 2024년 새해부터 다시 스멀스멀 누수의 낌새가 천장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세 번째 누수는 불과 한 달 전인 1월의 첫 토요일, 아침에 도서관을 청소하다 발견하게 되었다. 도서관 한편에 마련된 어린이 전용 공간을 닦으려고 보니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떨어져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누가 어젯밤에 물을 쏟았는데 안 치우고 퇴근한 건가?라는 의문과 함께 바닥을 닦았다. 차마 천장을 쳐다볼 생각은 못하고. 도서관의 새해 첫날은 바빴다. 직원 1명이 퇴사하고 이제는 주말에 혼자 근무해야 했기에 점심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기 힘들었다. 정신없이 도서관을 오가다 잠시 데스크에 앉자마자 어떤 여자분이 나에게 왔다.





"저기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거 알고 계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바쁜 와중에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아침에 봤던 거기를 말하는 거구나. 부리나케 누수가 생긴 곳으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려 실시간 라이브로. 세숫대야를 받쳐놓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세숫대야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날 테니 행주를 몇 겹 겹쳐서 바닥에 내려두고, 밟지 말라는 문구와 함께 초록색 마스킹테이프로 물이 떨어지는 범위를 넓게 표시해 두었다. 주말이지만 담당 주무관과 다음날 출근할 동료 선생님에게 상황을 알린 후 행주를 치우고 세숫대야를 받쳐두고 도서관을 나섰다.



   주말을 모두 보내고 평일에 출근하자마자 누수가 발생한 곳을 확인했다. 더 이상 물이 떨어지진 않지만 천장엔 물이 흐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세숫대야는 물 없이 말라있었다. 동료 선생님의 말로는 일요일에 확인해 보니 하루종일 물이 흐르지 않았지만 퇴근 2분 전 확인해 보니 또 물이 새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주무관과 건물주 어르신에게 연락해 상황을 알렸고, 건물주 어르신이 확인하러 오실 예정이라고 했다. 동료 선생님은 윗 집에서 새는 게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시간이 흘러 건물주 어르신이 도서관과 2층 세입자의 집을 오가며 확인한 결과 2층 가정집의 싱크대에서 물이 새고 있었고, 건물주 어르신이 조치를 하는 것으로 세 번째 누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사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피로하기 마련이다. 내가 직접 수리할 업체를 선정하는 건 아니지만 만나야 할 이해관계자는 많고, 누군가 설명을 요청할 때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모든 의사결정도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담당 부서의 의견을 그대로 전해야 하니 과정이 길어진다. 쉽지 않지만 운영자와 이용자의 평온한 나날을 위해, 잠시 불편을 감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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