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상 May 15. 2020

궤도이탈의 좀비영화

영화 <데드 돈 다이>

<데드 돈 다이>(The Dead Don't Die, 2019)는 웃기면서도 당황스러운 영화이다. 그 중 가장은 식당의 시체를 보고 들짐승(Wild Animal)과 들짐승 떼(Several Wild Animals)를 의심하는 장면도 아니고, 와이파이와 블루투스를 중얼거리는 좀비도 아니라, 좀비로 에워싸인 경찰차 안에서 로니(아담 드라이버)와 클리프(빌 머레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결국은 끝이 안 좋을 것 같다.”는 로니의 말에 클리프가 어떻게 그걸 예상했느냐고 묻자 로니는 사실 짐(감독인 짐 자무쉬)이 대본을 줘서 다 읽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그 장르가 좀비영화인데도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무미건조하게 등장시키더니, 이제는 관객에게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데드 돈 다이>에 두 가지 이야기 또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면, 하나는 센터빌이라는 공간에서 좀비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상황과 다른 하나로는 은둔자 밥의 시선으로 영화 속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우리가 영화를 바라보듯이, 은둔자 밥도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본다. 밥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들, 이를테면 야단법석인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한다던가, 센터빌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그로부터 분리된 자리에서 바라본다(유독 밥만큼은 그 수많은 좀비 떼로부터 안전하다.). 마치 그가 숲에서 주운 허먼 멜빌의 백경(고래와 싸우다 바다에 빠져 죽은 선장의 비극을 거기서 생존한 선원이 전하는 방식으로 쓰인 소설)처럼, 밥은 눈앞에 펼쳐진 센터빌의 광경을 바라보고 생존자로서 그 상황을 전달한다(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밥의 내레이션이 등장하여 그의 시점으로 쇼트가 구성된다.).


센터빌의 비극은 영화 속 뉴스보도가 줄곧 전하듯이 지구 자전축의 변화로 시작된다. 그 영향은 프레임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내부의 질서를 망가뜨리는데, 영화는 그걸 시간의 무질서로서 보여준다. 영화 속 세계는 해가 져야할 시간에 해가지지 않는다거나 갑자기 인물들이 차고 있는 시계가 멈춰버린다. 영화의 주요소재인 좀비 또한 육체가 죽음이라는 사후의 시간에서 이탈했다는 점에서 시간의 질서가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영화와 같은 제목인 스터질 심슨의 노래 ‘The Dead Don't Die'는 영화의 아무데서나 갑자기 튀어나오는가 하면 그 빈번한 마주침 속에서 노래는 아무 때나 종료되어 끊기고 만다.


또 다른 질서의 붕괴로 <데드 돈 다이>는 기존 좀비영화와는 다른 방식의 문법으로 만들어졌다. <데드 돈 다이>는 짐 자무쉬 특유의 느릿느릿한 템포로 진행되는데, 이 지점에서 영화는 좀비를 소재로 할 뿐이지 기존 좀비영화의 호러가 부재하는 결과물로 이어진다. 보통의 좀비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정신 사나운 장면들과 속도가 사라지자 영화는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또한 시간과 결부된 감각의 문제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질서의 붕괴와 맞닿아 있다. 결국 영화 속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자 그 안의 영화마저도 바뀌어버렸다. 공동묘지의 좀비들을 바라보던 밥의 “세상의 종말이 왔어.”라는 대사는 지금 당면한 영화의 상황에 유효한 말이다.


그래서 지금 영화 속에서 우리가, 그리고 밥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를 본 대부분은 <데드 돈 다이>가 정치적 텍스트, 그러니까 트럼프의 미국에 대한 비판 그리고 물신숭배와 환경오염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작품이라 말한다. 이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소재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건 분명 사실이다. 이를테면 프랭크(스티브 부세미)가 처음 등장할 때 그가 쓰고 있는 모자의 문구('Keep America White Again')라든가 와이파이와 블루투스를 부르짖는 좀비 그리고 뉴스에서 줄곧 언급하는 지구 자전축의 변화 보도들 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영화에 잠깐 스쳐가는 배경으로 걸려있거나 영화가 보여주는 현상의 원인으로 제시될 뿐이다. 영화가 정작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로니와 클리프의 대화를 통해 관객에게 주지시키다시피 한 ‘영화’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데드 돈 다이>를 보고 정치적 텍스트라고만 말하는 것은 절반만 이야기하는 것이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과 같다. 이 영화는 정치적 텍스트긴 하지만, 오히려 그 영향 아래에 놓여 징후로서 드러나는 영화에게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향 아래서 좀비영화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좀비들이 등장하고 호러 영화라기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워진다. 미국의 영화들(대표적으로 조지 로메르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레퍼런스로 가져왔다지만, <데드 돈 다이>는 그 레퍼런스들과 달리 기존의 좀비영화의 계보에서 이탈한 작품이 되었다. <데드 돈 다이>를 두고 괴작이라 한다면, 그건 영화 속 세계의 고장과 함께 시간의 질서가 망가졌듯이, 미국이라는 고장 난 세계의 시네마 역사에서 이탈과 함께 탄생했기 때문이다.


스터질 심슨의 ‘The Dead Don't Die'를 들으며 인물들은 마치 어떠한 향수에 젖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이러한 장면들에서 이미 지나와버린 어떤 시간들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데드 돈 다이>에서 본 것은 어쩌면 그러한 시간들 이후에 폐허가 되어가는 미국 시네마의 모습일까. 영화에서 현재로서 도달한 폐허의 이미지가 이미 발생한 시간인지, 발생할 시간인지는 알 수 없다. 사건이 끝나면 주인공이 마을을 떠나는 서부극처럼, 어쩌면 지금 하나의 중요한 시간이 시네마를 떠나가고 있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Au Revoir Agnès Vard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