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이었다. 조경학과 후배의 연락에 책상의 화분이 생각나 물었다.
"한 달 넘었지 싶은데 이거 왜 싹이 안 날까? 보름이면 된다고 쓰여있는데 말이야."
"오빠, 물 줬어요?"
"처음에 몇 번? 그리고 가끔 생각날때 먹다 남은 물 부어줬지!"
"어휴. 그러니까 안 나죠. 발아 전까지는 흠뻑 줘야 한다고요. 게다가 지금 겨울이잖아요. 자주 줘야 해요. 그건 이미 글렀어요. 다음엔 잘 주세요."
어떤 씨앗이냐며, 와중에 라벤더를 골랐냐며, 나를 대견하다고 말하다가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어왔다. 나도 할 말은 있었다. 포장지의 '라벤더 키우는 법'을 충실히 따랐으니까. 며칠에 한 번씩 적당량의 물이라길래. 화분은 작았으니까. 그만한 정도만 뿌려주었다.
식물을 처음 가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집에는 화분이 몇 개, 개중에는 꽃피우기 힘들다는 난초도 있었다. 쉬는 날이면 엄마는 나를 시켜서 화분을 베란다에 두었다가, 밖에서 비도 맞게 했다가, 가끔 노란 영양제도 꽂아두면서 조막만 한 손길을 주게 했다. 어렸던 나는 영양제가 주사기 모양이었기 때문에 사람도 아닌 것이 주사를 맞는다는 사실이 우스웠을 뿐이었다. 밤이면 먼지가 쌓인 잎을 고운 천으로 닦기까지 했는데 그러니까 난초 키우기 설명서를 만든다면 절대 쓰이지 않을 일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화단의 풀들은 잘 자라니까. 라벤더도 물 몇 번 주는 정도면 그네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사치스러운 일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엄마의 일들이 필수적인 일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라벤더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싹이 트고 잎이 자라는 만큼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그 공상의 결과로 다이소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이천 원짜리 라벤더 화분은 자라나지 못했다. 그리고 긴 여행의 시작도 싹조차 틔우지 못한 라벤더를 버렸던 그 겨울이었다.
겨울이 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무렵까지 나는 태국에 있었다. 그리고 치앙라이에서 브런치에 지원했다. 삼 일 째 되는 날 합격 메일을 받았고 신청서에 첨부했던 글 두 개를 올리며 매거진 제목을 '여행의 정복'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미 좋은 여행을 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잘하고 싶다는 소망에서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이 넘는 동안에도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태국에서 송크란을 보내고, 캄보디아에 가고, 네팔 히말라야를 걷고 내려올 때까지도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가 집에 가면 떠오를지도 모른다며, 혹시 알게 되면 다시 나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인천행 비행기를 비자 만료 나흘 전에 끊었다. 그렇게 돌아왔던 날. 부모님과 함께 가는 집에 길이었다. 비 내리는 도로 위에서 엄마가 말했다. "너는 누굴 닮아서 나돌아다니길 좋아하냐.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 아무도 없는데." 대꾸도 않은 채 듣고 있다가 속으로 다른 의문이 들었다. 내 여행의 시작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나를 밖으로 이끌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집으로 돌아왔을까.
혼자 했던 첫 여행은 수능이 끝난 겨울의 내일로 기차여행이었다. 지금은 폐쇄된 집 앞의 작은 역에서 첫 기차를 타면서 여행은 시작되었다. 하동을 지날 즈음 시작되던 일출이 보리인지 무엇인지 모를 논밭의 얼룩덜룩한 회색을 금빛으로 바꾸는 풍경을 보면서 그 자체만으로 나조차 풍성해져 벅차올랐다. 사방으로 반사되고 간섭되던 빛은 일주일 동안 몸을 타고 흐르며 여행에서 만난 경험들을 그것과 같게 물들였다. 그때는 '여행이란 어떤 것이다'라는 상념 자체가 없었다. 집을 떠나는 일만으로 행복했다. 집을 떠나 어디로 향하는 것. 새로움을 보는 일이 내가 아는 여행의 모든 면이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짧은 여행조차 잦은 편이 아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기억에 남는 여행이라고는 신년 일출을 보기 위해 남해 금산에 오르던 일과 초파일 즈음마다 멀지 않은 산사에서 스님을 뵙던 일 뿐이다. 가족끼리 영화 한 편을 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집 근처의 공업 단지에서는 주기적으로 영화, 뮤지컬, 클래식 공연 등의 문화 행사를 기획해 시민들을 초청했다. 당시에는 영화관이 멀리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그 문화 행사는 무료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다. 행사는 달마다 새롭게 바뀌었지만 부모님과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가끔 엄마가 함께했고 꼭 봐야겠다고 조르면 누나와 갔다.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아빠가 데리러 오셨는데 재미있었냐고 내게 물으시곤 했다. 나는 정말 재미있게 봤을지라도 대답을 들은 아빠가 보고 싶어질까 봐, 혹 부러움을 느낄까, 내 딴에 배려한답시고 "그럭저럭"이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없었더라도 재미있게 봤다고 답하는 편이 서로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었으리라. 아빠는 매일 바빴고, 같이 영화를 볼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은 나보다 자주 영화관에 가서는 팝콘 몇 개를 쥔 채로 잠들더라도 끝나고 나오면서는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다며 웃는 그들이지만 불과 십몇 년 전에는 주말이면 영화보다 밀린 집안일을, 피로에 절은 몸을 위해 차라리 단잠을 청해야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여행도 이십 년 전 그대로였다. 그들의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비행기를 타는 일이 두 번쯤이었을까. 여행은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고 연고가 없는 장소에 가는 일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입대 후 상병 즈음 나왔던 휴가에서 전역 후에 유럽여행을 가고 싶다는 나의 소망을 처음 말했을 때 그들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답했다. 국내 여행이나 다른 취미를 하라며 나를 달랬다. 다음 휴가에서는 혼자는 안 되다고 함께 갈 친구를 찾아오라고 말했고 마지막 휴가에서는 허락도 거절도 아닌 모호한 말들이 오갔다. 답답해진 나는 허락하지 않아도 가겠다고, 모아 둔 돈으로 얼마간 지낼 것이며, 부대 복귀 전에 티켓을 끊을 거라고 말했다. 일련의 상황들이 내 의지를 시험하려던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부터 그들은 나의 여행 계획을 듣기 시작했다.
전역 후에 유럽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권의 책에서였다. 입대 전날 밤 은영이가 굳이 동아리방까지 들러 선물을 주고 갔다. 동그라미가 빽빽했던 붉은 포장 안에는 에메랄드빛 여행 에세이 한 권 있었다. 나는 첫 장을 넘기자마자 그 책에 빠져들었다. 정확히는 '#1 심장이 시켰다'라고 시작되는 한 장에 남다른 애정이 갔다. 내무반에 가져가 틈틈이 읽다가, 복학하면서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본가에 보내면서 그 한 장은 찢어 두었다. 그리고는 자주 지나가면 자주 읽겠다는 생각으로 현관 중문에 붙여 두었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옷장으로, 냉장고 옆으로 옮겨 붙인 적은 있어도 완전히 떼어 버린 적은 없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소중히 챙긴 것도 그것이었다. 언젠가 엄마가 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부적은 집에 두었으면서도 그 심장의 조각만큼은 고이 챙겨두었다. 처음에는 언젠가 여행을 가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작고 말랑했던 소망의 씨앗은 어느새 잎을 펼치고 뿌리를 내리며 마음을 장악해갔다. 전역할 즈음에는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무성해졌다.
힘들게 시작했던 유럽 여행에서는 또래 한국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숙소에서, 버스 대기 줄에서 친구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웬만하면 여행지마다 동행을 구해서 다녔고, 종일 같이 보고 마시며 즐겁게 지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는 게 그 여행의 재미였다. 한국에 오고서도 얼마간은 친구들과 오가며 추억을 이어붙이는 재미를 느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연락이 드물어지고 기억은 시들해졌다. 분명 심장이 시켰던 그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말하던 여행과 다르지 않았다. 돈과 시간을 소비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 차라리 어학연수를 갔더라면 영어 실력이라도 늘었겠다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행을 시작하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 생각했던 나는 당혹스러웠다.
행복해지려면 돈으로 경험을 사라고들 말한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시대이니 일반적인 경험을 사라는 조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유럽에서 남겨온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에펠탑 밑에서 비웠던 수많은 와인은 어디쯤일까. 세 번의 비행 후에 오로라 밑에서 남긴 사진은 얼마짜리일까.
그 시절의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책을 읽고, 강연 듣고, 여행을 다녔지만 하고 싶은 일 따위는 생겨나지 않았다. 차라리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게 낫다고, 아무런 일이나 하면 되지 않겠냐고 혹자는 말했지만 왜인지 금방이라도 "짠, 이게 네 천직이야"라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 모든 일에 흥미가 생기지 않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배우려 기보다는 '저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 아닐 거야'. 혹은 '어려서부터 하던 일이기 때문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치부해버렸다. 백마 탄 왕자님만을 기다리는 공주님처럼 나는 집 주위만 서성거리며 오지 않을 순간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미래는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0에서 생겨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00이 완전체라면 어딘가에서 0.1을 가져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0.1이 있다면 1보다 0.2를 향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언젠가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 공기, 빛이 필요하다고 배웠다. 하나의 씨앗도 줄기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필요한 양분이 다르니 식물을 잘 키우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집에 나무도 있었다. 세 뼘쯤 되었던 나무는 수년 동안 화분을 몇 개나 갈아치우며 어린 내 키까지 자랐다. 여기에 물을 주는 일도 내 차지였기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분을 베란다로 옮기고는 화분 밑으로 물이 주르륵 흐를 때까지 흠뻑 주곤 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지나고 아빠는 나무를 위해서 아파트 화단에 옮겨 심겠다고 말했다. 줄기가 자나라고 잎은 무성했기에 집은 충분히 볕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렸던 나는 왜 화초를 키우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집 밖 몇 미터면 화단에 꽃이며, 풀이며, 조금 걷는다면 논과 밭까지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라벤더를 키우려고 시도했던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어 놓은 씨앗이 잘 자라기를 소망하는 즐거움을 늦게서야 알았던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달라도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더라."고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오랫동안 말해왔다. 그런데 올해 여름에 "사람 사는 게 다를 수 있더라."고 말하고 다닌 건 태국 사람들의 삶이 정말 달라서가 아니었다. 기대했던 어떤 경험에 마음이 동했고 그것이 삶의 다양한 면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말하는 게 정답에 가깝다. 그리고 같은 것들을 반년 동안 더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담아왔으니 빨리 키워내고 싶을 터였다.
여행은 일상만 살았더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멋진 일들에 대한 기준을 바꿨다. 이전의 내가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내가 정말로 닮고 싶어서 간직하는 모습들-여행에서 보고 느꼈던-이 이어서 튀어나온다. 그리고 내게 물어본다. '네가 되고 싶은 쪽은 어느 쪽이냐고.' 나는 주저 없이 뒤에 등장한 놈의 손을 쥔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아는 편이고 가야 할 목적지마저 알았으니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변화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간직했던 순간과 닮아가는 일. 그리고 모아온 소망을 모두 소화할 즈음에, 새로운 여행을 하는 일. 이것이 여행을 정복하는 방법이 아닐까.